[6인치 미술관] “내 작품은 모호함에서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 후 한국으로
실리콘, 대리석 등 다양한 재료 사용
공간은 흰 도화지나 다름없어
역사 깃든 곳에 전시하고파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탁한 회색과 검붉은색, 진한 감색도 설치 작가 정그림(30)의 손을 거치면 빛을 떨어뜨린 것처럼 환한 오라(aura)를 뿜어낸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유럽의 어느 가판에서 팔고 있는 여름철 과일이 떠오른다. 파란색에도 하늘색, 코발트, 인디고, 아쿠아마린 등 수많은 종류가 있듯 정 작가는 색을 만들 때 배합을 조금씩 달리해 스스로만의 색을 만든다. 그는 “세상에 다양한 색이 존재하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작품에 필요한 색을 지정하는 건 예술가가 가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가의 작품에서 색에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면 그다음은 형태를 볼 차례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실리콘을 페이스트리처럼 꼬아놓은 의자와 스프링처럼 구부린 조형물…. 작가의 대표 작품인 ‘모노(Mono) 시리즈’다. 2016년 작가가 프랑스 미술학교 랭스 보자르(École Supérieure d’Art et de Design de Reims)에서 오브제와 공간 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학교 과제로 탄생한 작업물이다.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온 이유
이후 모노 시리즈는 그가 전업 작가로 나서는 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됐다. 보테가베네타와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유명 패션 브랜드가 그의 작품에 푹 빠진 이유는 뭘까. 그의 새로운 작업실에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9월 1일 찾은 그의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시원시원한 크기의 작품만큼이나 시원하고 활기찬 표정의 작가가 취재팀을 웃으며 반겼다.
학교 졸업 후 바로 한국에 들어와서 아쉽지는 않나.
“효율을 좀 더 따졌을 뿐 아쉽지는 않다. 작업 기반을 다지려면 환경이 안정적이어야겠더라. 외국에서 일하면 비자처럼 한국에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신경을 써야 해서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하기가 어렵다. 한국에는 가족과 오랜 친구가 있고, 작업하기에도 제격이었다. 여기 머물더라도 외국에서 전시하거나,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다시 만난 서울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울은 트렌디하고 변화가 빠르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하는 곳이라 재밌는 작업물이 많이 나왔다. 흥미로운 프로젝트도 자주 생겨난다. 다만 오래 남았으면 하는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쉽다. 서울 중구 을지로 금속 공장 사장님들과 일하며 가끔 막걸리 한잔을 걸치면서 작업 얘기를 나눴다. 그런 골목만의 흔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데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커리어에 공백이 없다.
“타이밍이 좋았다. 2018년 독일 베를린 펑셔널 아트 갤러리(Functional Art Gallery)에서 내가 SNS에 올린 모노 시리즈 작업을 보고 같이 전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개인적으로 애정을 기울인 작업이라 굉장히 놀랐다. 그렇게 첫 단체전을 열었고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대구와 인천, 중국 상하이 등 곳곳에서 알음알음 전시를 하며 여기까지 왔다.”
“작업 과정은 크게 두 단계다. 먼저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거나 목업(mock-up)으로 만든다. 그 후에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간다. 구상한 것을 3D 모델링을 활용해 3차원적으로 만들어볼 때도 있다.”
재료에 대한 호기심과 고민
[+영상] 보테가베네타, 루이비통도 빠진 '정그림'표 작품입니다.
작가는 2017년 실리콘을 사용한 모노 시리즈를 시작으로 2020년 금속으로 만든 플로(Flow) 시리즈와 대리석을 사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지난해부터는 3D 프린팅에도 관심을 두면서 프린팅 후 남은 재료를 재활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가가 옆에 놓인 주황색 모노 시리즈 의자 작품을 가리키며 “이건 최근에 만든 작품이다. 추상적 형태에서 누가 봐도 의자임을 알 수 있게끔 구상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모노 시리즈를 구상한 계기가 궁금하다.
“재료에 관한 고민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을 만들고 싶었는데 단순히 ‘의자’로 정의하기는 싫었다. 고정관념 속 의자의 모습을 배제하면 어떤 작업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걸 표현하기에 적절한 재료를 찾다가 실리콘을 만났다. 공간에 펼쳐놓으니 기다란 튜브에서 리듬감이 느껴지더라. 선을 반복적으로 모아서 앉을 수 있는 면을 만들고 선으로 그림을 그리듯 작품을 만들었다.”
최근엔 어떤 작업을 했나.
“매년 한 해를 시작할 때 꼭 시도할 일을 계획한다. 올해 계획은 ‘최대한 여러 재료를 써보기’였다.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 주간에 연 협업 전시에서 3D 프린팅을 하고 남은 폐자재를 분쇄해 이를 재프린팅해서 큰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재활용 비율이 100%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패션 브랜드 엘씨디씨(LCDC)와 협업해 PVC와 비슷한 재질을 한 대형 풍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 전통 기법이 궁금해져서 나전칠기 자개에도 손을 댔다. 철제나 알루미늄에도 관심이 많다.”
내게 공간은 도화지
정 작가의 작품은 어느 건물이나 공간에 들여놔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그것을 둘 공간에 대한 고민부터 한다고 했다.
작품을 만들 때 공간부터 고려한다고.
“서울 종로구 구기동 갤러리 나인(Gallerynine9)에서 개인전을 연 적이 있다. 층고가 6m인 곳이었는데 복층 구조라 작품을 두 층에 걸쳐 볼 수 있었다. 옆에는 세로로 긴 창이 있고 창밖으로는 북한산이 보였다. 그 장점을 다 활용하고 싶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다. 창밖의 자연 풍경이 작품과 겹쳐서 보이도록.”
전시할 때도 어디서 하는지가 정말 중요하겠다.
“전시를 준비할 때 공간까지 관여할 수 있는 전시라면 미리 가서 어떻게 활용할지 상세히 계획한다. 공간은 내게 도화지다. 회화 작가들이 캔버스를 펼쳐놓고 그림을 구상하는 것처럼 나는 펼쳐진 공간에서 작품을 구상한다. 공간 안에 입체적 그림을 그린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작품을 제작할 때 자연물의 형상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신기하게도 본능적으로 자연물의 모양을 따라가게 되더라. 식물이 자라나는 형태나 동물의 패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재료를 구부리고, 돌리는 과정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양을 찾으려고 애쓴다. 벽 모퉁이에 딱 들어맞는 조명을 만든 적이 있다. 공간을 보니 (담쟁이넝쿨처럼) 구불구불한 선이 벽을 타고 올라가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앞으로 작품을 전시해 보고 싶은 공간이 있나.
“이탈리아의 벽화나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건축양식이 있는 공간, 역사가 깊은 한국의 공간 등 그 나라의 특성이 보이는 오래된 공간에서 전시를 열어보고 싶다. 공간의 특수성·역사성이 돋보이는 곳에 작품이 놓이면 과거와 현대 미술이 맞닿는 기분이 들 것 같다.”
모호함에 매료된 사람들
2021년 6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보테가베네타가 디지털 저널 ‘이슈 02(ISSUE 02)’를 발행하며 정 작가와 협업한 모노 시리즈 작품을 실었다. 작품은 보테가베네타의 영국 런던 쇼디치 팝업 스토어에 설치됐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도 정 작가의 작품을 매장 벽에 걸었다. 이후에도 정 작가는 패션 브랜드 마르디 메크르디(Mardi Mercredi), 대리석 리빙 브랜드 ‘르마블(Le Marble)’ 등 국내 브랜드와 협업을 이어갔다.
보테가베네타에서 연락받았을 때 어땠나.
“모든 프로젝트는 취소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들뜨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할 수 있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 여겼다. 마침 그 시기에 나온 컬렉션 제품들이 내 작업과 비슷해서 소통이 한결 수월했다. 많은 분이 좋아해 줘서 즐겁게 작업했다.”
패션·아트 브랜드에서 정그림을 찾는 이유가 뭘까.
“브랜드 같은 경우에는 색감과 형태감에서 느껴지는 대중성 때문에 날 찾는 게 아닐까 싶다. 추상적 형태는 일견 대중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볼드한 모양은 요즘 대중이 좋아할 지점이니까. 아트 신에서는 내 작품의 시작점이 ‘모호함’이다 보니 열려 있는 해석을 좋게 봐주는 것 같다. 그 덕에 협업할 때 더 흥미로운 작업이 탄생한다.”
정그림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든 감상해도 좋다. 버릇 같은 건데, 어떤 작품을 만들더라도 특정 사물로 정의할 수 없도록 최대한 모호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 재료로 만들어진 적 없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재료에 대한 조사를 꼼꼼히 하는 편이다. 그래야 관객이 작품을 보고 각자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뭐든 상상할 수 있다. 작품의 모호함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환영이다. 그게 추상미술의 장점 아닌가.”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이진수 기자 h2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