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찰 총액만 3억원, 완벽주의자 '도도새 작가' 김선우
영 컬렉터가 사랑한! 젊은 작가 신드롬의 주인공
화가가 직장인 출근 시간보다도 이른 오전 5시부터 그림을 그린다면 믿을까. 도도새를 그리는 김선우가 그렇다. 평창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최고의 상태에서 좋은 작업이 나온다고 믿는다”고 했다.
평창동 꼭대기에 위치한 '도도 스튜디오' 작업실에서 찍은 작가 모습 [사진 김도균]2월 12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갤러리 가나아트센터를 찾았다. 스타일 좋은 2030 트렌드세터가 다 모인 느낌이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미술계 떠오르는 스타 작가 김선우(34)의 도도새를 영접하는 것이다. 가나아트센터에서는 1월 27일~2월 27일 한 달간 김선우 개인전 ‘파라다이스(Paradise)’를 열고 있다. 중년 방문객이나 단골 컬렉터들이 주로 찾던 갤러리에 젊은 사람이 북적이는 풍경이 낯설다. 작가의 힘을 실감케 하는 경험이었다.
김선우는 지난해 9월 28일 서울옥션 ‘가을 세일’ 경매에서 ‘모리셔스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on La Mauritius)’가 1억1500만원에 팔려나가며 화제를 모은 작가. 이 금액은 추정가보다 7배나 높은 것이다. 현재 김선우가 한국 미술계에서 얼마나 뜨거운 이름인지를 증명한 사례다.
미술 애호가들이 김선우 하면 동시에 떠올리는 키워드는 도도새다. 인도양 모리셔스 섬에 살다 1681년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으로 멸종한 새. 김선우는 이 새 연작을 통해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에는 횃불을 들고 있는 도도새, 배를 타는 도도새, 멍하니 누워 있는 도도새 등 다양한 도도새가 담겨 있다. 이 새가 태어나는 곳, 서울 평창동 작가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스튜디오 도도’라는 이름이 붙은 작업실 안에 들어서자 통창 너머로 동네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잘 정돈된 물감과 책상, 스케치 컬러 번호가 꼼꼼히 적힌 그림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챘다.
지난해 ‘모리셔스 섬의 일요일 오후’ 작품 경매 이후 작가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부쩍 커졌어요. 지난해 작품 값이 가장 많이 오른 작가 중 한 분으로 꼽히셨죠.
감사한 일이에요. 제 직업의 가치는, 사람들이 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생기잖아요. 제 그림에 많은 분이 공감해주시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쁘죠. 한편으로 부담도 돼요. 요즘 작가로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마주해서요.
전시장에 오는 대중 반응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일단 찾아오는 분이 크게 많아진 걸 체감해요. 다만 연령대로 보면 원래 20~40대 비교적 젊은 분들이 제 작품을 좋아하셨던 터라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최근 ‘영 컬렉터’가 미술시장에 대거 등장하면서 작가님 같은 1980~90년대생 젊은 작가들이 주목을 받고 있어요.
굉장히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미술 분야 진입장벽이 높았잖아요. 왠지 고급스러운 문화일 것 같아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려니’ 하며 피해버리는 분도 많았고요. 최근엔 많이 달라졌어요. MZ세대 작가들은 소통을 좋아해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작가와 대중이 직접 대화를 나누니 미술에 대한 경계가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새로운 미술 문화가 정착돼가는 거죠.
작가님도 SNS(@dodo_seeker)를 활발히 사용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이제 SNS 사용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 것 같아요. 요즘 대중은 작품이 좋으면 그 작가가 누구일지 궁금해하잖아요. 앞으로 대중과의 소통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소통을 해야만 작가가 살아남게 될 거고요. 그러다 보니 ‘나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나의 어떤 면을 보여드려야 하나’ 같은 고민거리도 생겨요.
로얄 살루트, 신한카드 등 여러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도 하셨어요. 대외 활동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편견 없이 협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미술 작가가 대중과 경계를 허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예술의 대중화·일상화’인 거죠. 제 정체성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 다양한 협업을 통해 “미술은 다가가기 쉬운 것”이라는 걸 대중에게 알려드리고 싶어요.
대외 활동이 작업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나요
‘내 작업이 이렇게 확장될 수 있구나’같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는 계기가 돼요. 또 개인적 지식이나 경험도 많아지고요. 로얄 살루트랑 작업을 하려면 술에 대해 알아야 하잖아요. 저는 사실 술을 안 하는 사람이에요. 못 마시는 건 아니고 안 맞아서요. 그런데 위스키라는 술이 궁금했고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요즘 작가님 이름 앞에 ‘경매 시장이 키운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곤 해요. 대중적 성공에 질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작년에는 부담감이 굉장히 심했어요. 경매시장에 제가 그림을 내는 게 아니잖아요. 누군가 재판매를 하는 거죠.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어요. 옛날에 그린 작품 가치가 높아졌고, 사람들이 “김선우 작가가 성장했다”고 해줬으니까요. 그런데 좋은 일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다고, 저에 대해 이런저런 뒷말을 하는 분도 계신 것 같더라고요. 어느 순간 ‘나는 그림을 그릴 뿐인데 왜 이것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은 제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는 법을 잊은 새, 도도새를 그리는 이유
Sunset beach, 2021년 作이번 전시 주제가 ‘파라다이스’예요. 저는 그 전에도 작가님 그림을 보면서 항상 ‘지상낙원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 그림 속에 갇힌다면 천국에 갇힌 기분이겠지’ 하면서요(웃음). 주제 선정 이유가 궁금해요.
사람마다 자기가 꿈꾸는 낙원이 있을 거예요. 저는 ‘도도새’ 주제에 맞춰서 작업하면서 제가 그리는 공간이 정말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이상향, 꿈의 낙원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이번 주제 파라다이스는 고정불변의 장소가 아니에요. 언제든 변할 수 있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는 ‘역동적인 가능성의 바다’라는 의미에서 이 주제를 정했어요.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요즘 많이들 답답하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어두운 시대인데, 이런 현실과 대비되는 주제를 통해 밝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작가님한테 낙원은 어떤 곳일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곳이죠. 저는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사람이에요.
이제 작가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도도새 연작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대학생 때부터 ‘새 머리 인간’을 그렸어요. 머리는 새, 몸통은 살아 있는 인간인 존재를요. 새는 자유로운 동물이잖아요. 그런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인간 몸에 갇힌 모습이 저와 현대인을 대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주위 친구들을 보면 학생 때는 자유분방하다가도 사회에 나갈 무렵이 되면 하나씩 꿈을 포기해요.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으로 목표를 좁혀나가죠. 가능성에 한계를 짓고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여전히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는 나이이고, 우리 앞엔 다양한 길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계속 정상적인 삶·가족·인생에 대한 어떤 틀을 강요받잖아요. 그게 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르게 사는 데 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것들을 ‘새 인간’을 통해 표현했죠.
도도새는 언제 처음 등장한 건가요.
제가 대학 졸업하기 직전,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일현미술관’에서 작가를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었어요.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여행 계획을 세워 보내면, 우수한 지원자를 선발해 정말 여행을 보내준다는 거였죠. 이 공모전을 준비하다가 인터넷에서 우연히 도도새에 대한 이야기를 봤어요. 도도새가 멸종된 이유는 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죠.
원래 모리셔스 섬에는 사람이 없었대요. 그러니 도도새는 굳이 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비행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 1505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섬에 들어왔고, 도도새를 남획하기 시작하자 꼼짝 없이 멸종되고 만 거죠. 그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마침 날지 못하는 새 인간을 그려왔으니까 ‘이거 얘기 되겠다. 현지에 가서 연구를 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모리셔스 여행 계획을 세우신 거예요.
네. 바로 그 섬에 가보고 싶다는 계획서를 제출해 선정됐어요. 2015년 여름에 한 달간 현지에 가서 작품 연구를 했죠.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꾼 여행이에요.
이렇게 탄생한 김선우의 도도새 연작에는 그가 ‘새 인간’을 그릴 때부터 마음에 품어온 바로 그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당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는 것 말이다.
횃불을 든 도도새처럼 자유롭고 거침없게
현재 작업 중인 작품을 들여다 보는 김선우 작가 [사진 김도균]그동안 발표한 작품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도도새 모습이 있으신가요.
횃불을 들고 있는 도도새요. 어두운 것을 밝히고, 무엇인가 찾아내고, 어디론가 떠나잖아요. 저는 여행을 좋아해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점이 좋아서요. 물 한 잔을 마셔도 서울에 있을 때와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모리셔스 섬은 특히 그랬어요. 저에게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했죠. 그래서 탐험을 떠나는 도도새의 형상에 가장 애착이 가요.
가장 애착이 가는 그림을 꼽아주신다면요.
지금은 저한테 없는 그림인데요. 제가 독일 베를린의 한 호스텔 방에서 그린 드로잉이요. 모리셔스 섬에 다녀온 뒤 어떻게 작업을 해나갈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 운 좋게 다른 공모에 당선돼 베를린 왕복 항공권을 얻었죠. 돈도 ‘백’도 없는 작가는 전시 기회를 얻기 힘드니까,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공모전을 열 때마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제출하면서 1년 내내 입사 지원하는 기분으로 살아요. 그때도 포트폴리오를 여러 개 준비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베를린에 건너갔죠. 싸구려 호스텔에 묵으면서 일주일 동안 저를 알리려고 온갖 갤러리를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거짓말 안 하고 100전 100패를 당했어요. 그림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나가라”며 문전박대하더라고요. 자존심이 상하고 힘도 들어서 자기 비하를 많이 했어요. ‘한국에서도 안 되는데 여기서 안 되는 게 당연하지’ 하면서요. 그런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오기는 아무래도 아쉬운 거예요. 뭘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 보니 숙소 근처 공원에서 일요일마다 플리 마켓이 열리더라고요. 원래는 장사를 하려면 허가를 받고, 일정액의 돈도 내야 하는 곳이었는데 전 그런 것도 몰랐어요. ‘아무나 장사를 해도 되는 거겠지’ 하고는, 굉장히 추울 때였는데 길바닥에 앉아 호스텔에서 그린 그림을 팔았어요. 한 장당 10유로씩 받았는데 잘 팔리더라고요. 그때 한 드로잉이 지금 작업의 중요한 뼈대가 됐어요.
미대에 가려면 입시 미술을 해야 하잖아요. 정형화된 조건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게 답답하지는 않으셨어요.
너무 싫었어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그림을 못 그려서 대학 입시에서 한 번 떨어졌어요. 재수를 했죠. 미대에 들어가려면 따라야 하는 그림 형식이 있는데 그게 저랑 안 맞았어요. 대학에 가서도 초반엔 많이 힘들었고요.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희 학교에는 어떤 물체를 똑같이 그리라는 수업이 있었거든요. 그게 싫었어요. 모델을 보고 따라 그리는 수업도 싫었고요. 1학년 때는 정말 ‘개판’으로 다닌 것 같아요. 전공 수업 시간에 영화 보러 가고 그랬죠. 심지어는 전과 신청까지 하려고 했어요.
미대생이 어느 과로요.
영문학과요. 글 쓰고 책 읽는 걸 좋아해서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 와서 생각하자’ 하고는 군대에 갔어요.
동국대 서양화과를 나오셨죠.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니까 간 거지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가 되겠어’라는 생각으로 간 건 아니에요. 그러다 대학 3학년 때 학교 은사님인 변웅필 작가님을 만났어요. 자기 신념을 이미지로 표현하며 살아간다는 게 정말 멋있더라고요. 그분께 작가의 삶을 배운 것 같아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승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이 변 작가님, 다른 한 분이 오원배 교수님이에요. 오 교수님께는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성실한 태도에 대해 배웠죠. 학부 시절 저희에게 일주일에 드로잉을 200장씩 그리라고 시키셨어요. 처음엔 힘들다고 속으로 욕도 했는데 그때 드로잉을 많이 하는 습관이 잡힌 것 같아요. 완결된 작품을 만드는 건 마음속에 떠다니는 문장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엮는 것 같은 과정이거든요. 교수님이 저희에게 그 훈련을 시켜주신 거죠.
말씀을 들어보면 굉장히 성실하게 작업을 하시는 스타일로 보입니다. 아까 둘러보니 작업 중인 그림에 컬러 번호를 세세히 적어놓으신 게 눈에 띄더라고요.
저는 오전 5시쯤 작업실에 나와서 오후 5시까지 12시간 정도 있다가 퇴근해요. 밤에는 잠을 자고요. 밤새워 일하고 다음 날 컨디션이 무너지는 걸 혐오할 정도로 싫어해서, 저한테는 이런 패턴이 잘 맞아요. 학교 다닐 때도 야간작업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요즘 ‘미라클 모닝(일찍 일어나 오전 시간을 길게 보내는 생활 습관을 일컫는 신조어)’이라는 말이 유행이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것에 ‘기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새벽은 세상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시간이에요. 집중이 가장 잘되는 시간을 작업에 투자하는 게 제 작품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해요.
Paradise of Dodo, 2022년 作 [사진제공 가나아트]작업 방식은 어떤가요.
저는 보통 스케치 단계에서 모든 게 결정 난다고 생각해요. 스케치를 하는 순간 머릿속에 완성작이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거의 순수한 노동이에요. 그래서 들인 습관이 작업하면서 책을 읽는 거예요. 정확히는 오디오 북을 듣죠. ‘작업 시간=독서 시간’이어서 1년에 한 100~ 200권 정도 읽어요.
작업실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 볼게요. 작업실이 평창동에 있네요.
3년 전 가나아트센터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근처에 있는 단독주택 2층 방을 작업실로 썼어요. 그때 지내보니 동네가 마음에 참 좋더라고요. 대중교통으로 오기 힘든 지역이라 그 전에는 와본 적이 없거든요. 이렇게 갤러리도 많고 자연 친화적인 곳이 서울에 있는 줄 몰랐어요. 부자 동네라 좀 괴리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예쁜 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작년에 레지던시 계약이 끝나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려고 좀 알아봤는데 다 번잡하고 눈에 안 찼어요. 한번 좋은 걸 경험하고 나면 다시 옛날로 못 돌아가잖아요(웃음). 마침 전에 사무실로 사용됐던 이 자리가 나와서 작업실을 꾸리기로 마음먹었죠. 근처에 아무것도 없어서 생각보다 비싸지는 않아요. 여기서는 편의점에 가려 해도 차로 10분이 걸리거든요. 그래도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라 에어컨도 있고, 인테리어도 새로 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정말 좋다” 하며 계약했어요.
작가님의 첫 작업실은 어디였나요. 작업실의 역사가 궁금해요.
이 주제로는 참 할 말이 많은데, 대학교 3학년 때 졸업 전시회를 마치고 “작가가 되겠다”고 집에 말씀드렸어요. 부모님이 “1원도 줄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요. 당연하고 맞는 말씀이에요. 집에 지원해줄 여력이 있다 해도 성인인데 그럴 이유가 없죠.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다’ 싶어 홀가분했어요. 다만 모아놓은 돈이 없어 좀 막막하긴 했죠. 그런 마음을 담아 SNS에 푸념을 좀 했어요. “작업하고 싶은데 돈은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얘기요(웃음). 그때 언론사 쪽에 취직한 선배가 연락을 줬어요. 알고 보니 그 형은 작업실을 다 찾아놓은 상태에서 취직이 된 거예요. 서울 은평구 불광동 연서시장에 있는 반지하 약 3.3㎡짜리 공간이었죠. 저한테 “나 일하니까, 월세 조금 내고 여기라도 잠깐 써라” 하더군요. 그게 첫 작업실이 됐어요. 거기 3~4개월 있었네요.
그다음에 서울 을지로에도 계셨다고요.
서울 중구청에서 공모를 통해 작가들한테 공간을 지원해주는 프로젝트를 했거든요. 도시재생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 아트 프로젝트’였죠. 을지로4가에 철공소 골목이 있잖아요. 상인들이 떠나면서 거기 빈 공간이 많이 생겼어요. 그걸 중구청이 빌려서 작가한테 다시 빌려주는 방식이었어요. 제게 주어진 건 차도 못 들어가는 아주 좁은 골목에 있는, 미닫이문이 달린 작은 방이었죠. 화장실도 없고 콘센트 구멍 두 개랑 수도꼭지가 하나 있었어요. 겨울엔 물감이 얼어서 물 끓여 녹여가며 작업했죠. 3년을 있었는데 석유난로를 사용하는 게 진짜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화장실도 지하철역에 있는 걸 써야 해서 정말 못 견딜 때까지 참고 또 참았고요. 돌아보면 젊으니까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얻은 건 많으셨겠어요.
그때 “(그림이) 운명이다”라는 걸 깨달았죠. 정말 힘든데 계속 작업실에 있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았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또 하나 거기서 얻은 것은 공공 예술 사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알게 된 거예요. 예술가들이 서류 행정 작업에 굉장히 약하거든요. 저는 그때 관과 협업하며 그 분야에 대해 감을 갖게 됐어요. 소중한 경험이죠.
그다음에 합정동 쪽으로 작업실을 옮기셨다고요.
지방자치단체 사업이었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을지로 작업실을 떠나야 했어요. 그 무렵 집에서는 제가 정상적인 직업을 갖지 않는 데 대해서 조금씩 불편해하시는 게 느껴졌고요. ‘집도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서로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그때 합정동에 싸게 나온 반지하방이 있기에 그리로 들어갔어요. 집 겸 작업실로 삼아 2년을 살았는데, 그 집에서 처음 여름을 나던 해가 생각나네요. 폭우가 엄청나게 왔어요. 그러자 마치 영화 ‘기생충’(2019)에서처럼 화장실 똥물이 역류하는 거예요. 물 퍼내고 잠기고 그런 경험을 했죠. 그림이 다 젖어서 그때 작품을 정말 많이 버렸어요.
김선우는 도도새 그림이 사랑을 받게 되기까지 자신이 거쳐온 길을 담담히 돌아봤다. 난방도 안 되는 작은 작업실,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그림에 대한 꿈을 놓지 않은 김선우는 2016년 젊은나래청년작가상, 2018년 아트인블록 크리에이티브 콘테스트 장려상, 2019년 삼성 #BESPOKE랑데뷰 디자인 공모전 우수상 등 온갖 상을 휩쓸며 조금씩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지금 그에게 쏠린 관심은 한 계단씩 부지런히 걸어 올라온 노력의 산물인 셈이다. 이제 그는 명실상부 한국 젊은 작가 그룹의 대표 선수가 됐다.
다른 작가들과도 많이 소통하며 지내시나요. 얼마 전 하태임 작가님과 서로 작업실에 방문하셨던데요.
다른 젊은 작가들에 비하면 소통이 적은 편이에요. 제가 MBTI 검사를 해보면 완전 I(내향)로 나오거든요. 사람을 잘 안 만나요. 제 여자 친구도 작가여서, 여자 친구까지 포함하면 다른 작가와 매일 소통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하태임 작가님은 원래 알고 지내던 분은 아니에요. 작가님이 어느 날 제 작품을 구입하셨다며 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한테 ‘대선배’인 정말 ‘대작가’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감사하고 감동도 받았어요. 까마득한 후배를 그렇게 대하실 수 있다니, 정말 존경스러워요.
작품을 감상하는 데 정답은 없겠지만 대중이 내 작품을 어떻게 봤으면 좋겠다, 혹은 전시장에서 어떤 감정을 갖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같은 바람이 있을까요.
제가 도도새를 통해 꿈과 자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잖아요. 대중이 도도새에 감정 이입을 하면 작가로서 보람을 느껴요. 이미 멸종된 새가 제 그림을 통해 다시 탄생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는 존재가 됐으니까요. ‘도도’에는 ‘바보’라는 뜻도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도도새를 보고 날지도 못하는 새가, 도망도 안 가서 그런 이름을 붙인 거래요. 저는 도도새를 ‘바보 새’보다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여겨주시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4~6월 프랑스 파리에 가게 됐어요. ‘시테 레지던시’라고 세계 작가들이 모여 각자 작업을 하는 시설이에요. 거기서 3개월 동안 작업을 하게 될 텐데 정말 설레고 신이 나요. 모리셔스에서 큰 변화를 겪은 것처럼 이 경험이 제게 또 어떤 전환점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l h2o@donga.com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