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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Jan 08. 2022

안 돼, 이건 지키기 위한 싸움이야

13기병방위권, 2019

2021년을 마무리하는 게임으로 바닐라웨어가 개발한 <13기병방위권>을 플레이했다. 바닐라웨어의 게임을 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제작사 특유의 몽환적이고 부드러운 일러스트와 메카물이라는 장르의 조합이 언발란스하여 죽 궁금했던 게임이다. 무엇보다 흥미를 끈 것은 ‘지금까지 이런 작품은 없었으며, 이 작품을 계승하는 작품도 나올 일 없을 것’,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를 목표로 삼고 있다면 반드시 해봐야 할 타이틀’이란 업계인들의 평이다.


붕괴편, 회상편, 탐구편으로 나뉘는 게임의 구성

    <13기병방위권>은 큰 틀에서 13명의 소년 소녀들이 어쩌다가 ‘기병’이라 불리는 로봇에 올라 ‘D’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괴수에 맞서기 위해 전장에 나서게 되었는지를 좇아나가는 게임이다. 게임은 회상편, 붕괴편, 탐구편 세 가지의 파트로 나뉘어 진행된다. 회상편은 등장인물 각각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이 과정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의 스토리가 교차되거나 작품의 주된 시대 배경인 80년대를 중심으로 과거 혹은 미래로의 타임 리프가 일어나기도 한다. 탐구편에는 회상편에서 얻은 단서와 이벤트 등이 기록되어 나중에 다시 열람이 가능하다. 탐구편은 일종의 아카이브로, 복잡한 게임의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정렬해서 모아볼 수 있기 때문에 틈틈이 확인하고 짚어가며 게임을 진행해나가는 것이 좋다. 붕괴편은 전투 파트다. 턴제 전투로 괴수에 맞서게 되며, 회상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등장인물들이 한데 모인 시점인 1985년 5월 27일의 최종 결전을 다루고 있다. 게임은 회상편과 붕괴편을 오가며 진행된다.



    게임은 초반부터 재미있다. 그래서 종잡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13명 모두의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쿠라베 주로’를 시작으로 하여 각 인물 스토리 진행도에 따라 진행할 수 있는 루트가 추가되는 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식으로 엮이게 될지 밑도 끝도 없이 궁금해진다. 복잡하면서도 매력적인 스토리에 재미를 더하는 것은 다양한 오마주 요소들이다. 야쿠시지 메구미는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아케미 호무라를, 타카미야 유키는 ‘스케반 형사’를, 시노노메 료코는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를 오마주 했음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사실 10대의 소년 소녀들이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을 안고 로봇에 올라타는 주축 서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브컬처 SF장르 오마주이자 클리셰라고 볼 수 있는데, 게임은 이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13기병방위권>만의 개성을 잃지 않는다. 인상적이고 탁월한 연출 또한 몰입에 큰 역할을 한다. 이는 스토리뿐 아니라 자칫 단조로워지기 십상인 턴제 전투 장면에서 빛을 발하는데,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민 메이 작전을 오마주한 제 2에이리어의 마지막 전투와 이를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해변의 바캉스’는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라 꼽지 않을까. 스토리의 주 무대를 80년대로 설정한 것이 이 전투 하나 때문이었다 해도 납득이 될 정도니까.



    <13기병방위권>은 신기한 게임이다. 서브컬처 SF물의 클리셰이면서도 클리셰가 아닌 게임이기 때문이다. JRPG, JAVG등에 응당 그러하리라 기대되는 피폐함이 부재한다. 13명의 등장인물에겐 휘몰아치는 진실에 말려들어 고뇌할 시간 따위가 없다. 당장 그들 곁에 있는 친구와 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소중하기 때문에 기병에 오른다. 그리고 지킨다. 게임은 한마디로 산뜻하다. <13기병방위권>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산뜻함 때문이다. 서브컬처 SF물에서는 여태껏 10대들을 지나치게 예민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병적으로 골몰하는 존재들로 그려온 업보가 있다. 10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주변의 청소년들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소년 소녀들이 이렇지는 않다. 오히려 넘치는 에너지 탓에 동기를 행위로 전환시키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행동 지향적인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때문에 <13기병방위권>의 파일럿들은 기존 서브컬쳐 SF물에서 다뤄진 10대들보다 훨씬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촘촘하고 빈틈이 없는 설정들과 서사 타임라인에 더해진 생동감 있는 등장인물들의 조형은 작품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림과 동시에, 여운은 진하지만 미련과 뒤탈이 남지 않는 개운한 플레이 경험을 선사한다.



    2021년도의 마지막 게임으로 <13기병방위권>을 플레이하고 새해를 맞이한 것이 기쁘다. 입소문을 타고 번져나간 게임의 호평 덕에 출시 2년 만에 닌텐도 스위치로의 이식이 결정된 것 또한 기쁜 소식이다. 스토리형 어드벤처 게임에 관심이 있다면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 날을 새 가면서도 패드를 도통 놓을 수 없는 게임이니만큼, 스위치로 플레이하는 것이 수월한 게임이지 않을까 싶다. 관심이 있다면 올 4월 발매를 놓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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