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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Oct 14. 2021

피와 살과 뼈

신도 야근을 하나요? (시즌1), 2021

밋앤그릿이 개발하고 2021년 8월 16일 최초 출시한 <신도 야근을 하나요?>(이하 ‘신야근’)의 시즌1을 플레이했다. 국산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흔치 않은 만큼, 출시 전 텀블벅에서 진행된 펀딩에도 참여하여 1년여 이상을 지켜보며 고대했던 게임이었기에 지난달 28일 출시된 iOS판이 특히나 더 반갑게 느껴졌다.


    해당 장르의 게임들 대부분이 그렇듯 <신야근> 또한 선택지를 통해 결과와 분기를 가르는 비주얼 노벨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메인 스토리는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에는 15개 안팎의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플레이어는 메인 스토리의 진행과 함께 게임 내 재화를 이용하여 선택적으로 '캐릭터 스토리'를 해금하거나 통화 기능을 이용하여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개발기간 중 사전 공개되기도 했던 UI는 Paper Games의 <러브앤프로듀서>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메인 화면의 구성이 상당히 유사한데, 세세하게 뜯어보면 한국의 감성을 담아 <신야근>의 색채에 맞게 녹여내기 위해 신경 쓴 흔적이 엿보인다.


    게임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신야근>에서는 '신'과 '야근'이 모두 나온다. 주인공은 가상의 도시 '소원시'의 시민이자 광고대행사 직원으로, 새해 하루 전 늦은 퇴근길에 자신을 달의 신이라 칭하는 '선하'를 만나 신이 되어 설화계라는 이계를 관장해줄 것을 부탁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은 설화계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신의 수행원들인 '사자'들을 만나 상황을 타개해나가고자 분투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광고대행사 주임이라는 직함에 매달린 사회인의 도리를 다 하면서 말이다.


    <신야근>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즌제로 계획된 게임인 만큼, 메인 스토리에 대한 평가는 나머지 두 시즌을 거치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세계관의 기틀이 되는 개괄적인 설정만이 풀렸다 볼 수 있는 현시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답은 의외로 빨리 나왔는데, 1회 차를 마치고 2회 차 플레이에 진입한 시점에서 다시 마주한 '전직' 달의 신 선하의 전언 때문이었다.


그를 구해주세요.


    사자들을 비롯한 공략 캐릭터들을 겨냥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이 대사가 엔딩을 보고 난 뒤에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이건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설화계 존재 모두를 아우르는 부탁이 아니었을까. 스토리 후반부에 드러나는 저승아씨의 정체와 서사를 되짚어보면 이 의문은 더욱 확신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왜 이들을 구해야 하는 걸까? 그전에, 애당초 설화계 존재들이란 대체 무엇일까? 스토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섣달그믐 밤 인간이 짓고 간직한 이야기에서 태어나며, 이야기는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순리이자 숙명이 된다. 피와 살과 뼈로는 되어있지 않으나 한없이 인간과 닮았으며(혹은 닮게 변하거나) 이변이 없는 한 사실상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간다. 개중에는 날 때부터 악하게 된 존재 '악신'도 있는데, 설화계를 볼 수 있는 인간인 '이야기꾼'은 물론이고 같은 설화계 존재들에게마저 지탄받는 운명을 지닌다.


    피가 흐르진 않지만 인간과 닮았고 인간이 정한 순리에 따라 살아가지만 각자의 의지와 감정을 가진 존재들… 재미있게도, 여기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안드로이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르도, 작품이 가진 색채도 전혀 다른 두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인간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오는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안드로이드들은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생김새를 지녔지만 인간을 해칠 수 없고, 인간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채 출하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이에 불복하여 인간을 해치거나 나아가서는 살인을 저지르는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데, 이 같은 사태가 불같이 번져나가자 인간들은 문제의 안드로이드들을 '불량품'이라 칭하며 수습에 나서게 된다.


    왠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 아닌가? <신야근>에서는 어떠한가. 설화계 존재들, 그중에서도 특히 악신은 인간이 짓고 정한 이야기의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지만 그 존재 자체를 이유로 동족과 인간들에게 배척당한다. 개중에는 그것을 거부하고 어떠한 힘을 빌려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섞여 살아간다. 주인공의 오랜 친구로 남고자 했던 저승아씨처럼 말이다.


    운명이라 여겼던 것에 따라 살면 그것대로 문제 삼고, 이를 벗어던지려 하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의지와 욕심을 품은 설화계 존재는 '불량품'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당연하고 순리인 일들이 범주를 조금만 벗어나면 죄가 되어버린다. 인간들은 누가 '진짜' 인간인지를 골라내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는 비단 저승아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사자로 대표되는 공략 캐릭터들에게서도 이러한 불량품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선하의 후임자이기 때문에 주인공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던 유예는 이야기의 절정부에서 곤란해하며 주인공의 뜻(명령)대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친다. 집행자인 백은 이미 오래전 사자로서의 지위를 내려놓고 주인공이 얽힌 운명을 위해 인간들 틈에 섞여 살고 있으며, 활과 은한 또한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체와 목적을 숨긴 채 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이 자아낸 존재들이지만 인간과 같은 욕망을 지녔기에 초래된 것이다.


    <신야근>은 시작부터 인간됨과 설화계란 모양을 한 운명과 순리에 대해서 질문하는 게임이다. 동시에 그것의 모순과 역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반복되며 상호 보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계와 설화계의 중간에는 주인공이 있다. 신의 자격자, 즉 반인반신의 존재가 된 주인공의 역할은 이 시점에서 굉장히 상징적이다. 인간을 대표하여 설화계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치된 존재. 아마 이것이 선하가 의도했던 주인공의 역할일 것이다. 그의 정확한 의중은 차기 시즌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나는 <신야근>이 결국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이것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제작진이 스토리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고 공언한 만큼, 이다음에 찾아올 이야기를 차분하게 기다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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