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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랖겪처 Nov 07. 2021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도시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2013. 그리고 엘리자베스

이래셔널 게임즈가 개발하고 2013년 최초발매한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와 DLC인 <바다의 무덤> 1, 2편을 최근 다시 플레이했다. 2007년에 발매된 시리즈의 첫 편부터 마지막 작품인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에 이르기까지, 바이오쇼크 시리즈는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박진감 넘치면서도 충격적인 전개와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메시지로 이미 수많은 호평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게임의 역사에 또렷한 각인을 새긴 이 시리즈와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이제와 톺아보고자 함은, 그만큼 나에게도 의미가 깊은 게임이기도 해서이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는 내가 처음으로 플레이하고, 또 엔딩까지 본 FPS 장르의 게임이다. 스팀에서 바이오쇼크 컴플리트 에디션을 구매한 것은 2016년도 즈음인데, 이른바 '키마' 플레이에 익숙지 않던 터라 콜롬비아에 입성하자마자 불쾌한 생김새의 포탑에 집중포화를 당해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천사상의 소녀'를 구하는 일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의 소녀를 구하려면 '기념비 섬'으로 향해야 하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복권 광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공중도시 콜롬비아는 나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도시였다.


    하지만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만큼은 뇌리에 남아, 마음의 한편은 늘 콜롬비아에 머물러있었다. 부커, 당신은 신이 두려운가요? 아니, 난 네가 무서워. 발사… 5초 후 발사… 4, 3, 2, 1. 오천 피트… 만 피트… 만 오천 피트… 할렐루야. 그러다가 콘솔게임기를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패드를 쥔 나는 무엇이든 어찌어찌해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콜롬비아에 들어서게 되었고, 처음으로 기념비 섬에 입성했을 때는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열두 시간을 꼬박 앉아 엔딩을 보았고, 스탭롤이 올라간 뒤 짤막하게 나온 쿠키영상의 여운은 일주일을 족히 넘겼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겨우 추스른 감정이 바다의 무덤(특히, 엘리자베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2편)에서 다시 와르르 무너졌다. 자신이 '진짜' 자신이 아니게 됐을 때, 그럼에도 '진짜'의 내가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을 '내'가 해내야 한다면 그때의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건 어린이 그 자체지, 유년 시절이 아니에요.


    인용한 엘리자베스의 대사는 시리즈의 핵을 관통한다. 랩처의 여아들은 자유주의란 명목 하에 납치되어 반인륜적인 실험과 세뇌를 당하고, 아담 채취를 위한 생체도구로 착취당한다. 선지자의 딸이자 콜롬비아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재목인 엘리자베스는 그가 원래 있던 세계선의 친부에게 팔리는 것도 모자라 콜롬비아에 와선 '표본'으로 감시당하며 거대한 천사상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도시가, 세계가, 우주가, 운명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랩처로 도망친 선지자, 컴스탁을 찾아내어 살해한 뒤 평생을 바라 마지않던 삶을 위해 파리로 망명한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깐일 뿐, 엘리자베스는 다시 랩처로 돌아오게 된다. 오른새끼손가락이 온전한 채 어떤 우주로도 건너간 적 없는 '시작'의 엘리자베스, 즉 안나Anna인 채로. 끝과 시작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안나라는 회문回文 구조의 이름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전투 중에 엘리자베스를 보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몸을 지킵니다.
전함 PA: 우리의 아내와 딸들이 놈의 기계에 당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겁니까?


    게임 본편을 진행하다 보면 플레이어는 엘리자베스가 스스로 자신을 지킨다는 지시문과, 아내와 딸로 대표되는 여성들을 적대세력의 피해자로 프레이밍하여 콜롬비아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자 하는 선지자의 프로파간다를 동시에 접하게 된다. 이 모순되는 메시지들이 플레이어에게로 와 교차되는 지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이런 부분이 '엘리자베스 컴스탁' 즉 '안나 드윗'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단 엘리자베스뿐 아니라, 바이오쇼크의 세계에선 소녀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가며 애쓴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 속죄를 위해 리틀 시스터들을 돕는 테넌바움 박사, 뒤틀린 우주를 바로잡고자 주인공 앞에 나타난 루테스 박사,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고도 엘리자베스를 위해 피의 결단을 내린 핏츠로이… 이들의 도움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도시에서 자신을 지켜낸 엘리자베스는 우주의 인과를 부수어 다른 소녀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도시로 향하게 된다.



    앞서 했던 물음을 다시 해보고자 한다. 자신이 '진짜' 자신이 아니게 됐을 때, 그럼에도 '진짜'의 내가 매듭지어야만 하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한다면 그때의 우리는 과연 무엇일까? 사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안나가 여기에 대한 답을 주고 있는 듯하다. 네가 그리로 달려가고 있다면 그런 것은 이미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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