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근데 언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영 Feb 07. 2024

2024년의 너와 나

제주에서 런던으로 보내는 편지


오랜만이지.


오늘 제주는 종일 흐렸어.

흐린 날에 대해서라면 너도 할 말이 많겠지?


네게 편지를 쓰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먼저 말하고 싶어.


방학이라 학교 수업이 다 오전으로 바뀌었고, 오후와 주말에는 도서관 수업이 주 3회로 잡혀 있어. 다른 집 아이들은 방학이라 늦잠 자는데 우리 아이들은 더 바빠진 엄마 아빠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야 해. 두 아이 등을 떠밀어 후다닥 등원, 등교를 시키고 학교에 가. 수업 마치고 집에 와 점심 먹으면 큰아이를 돌봄교실에서 데려올 시간이야. 피아노 학원 보내고 둘째까지 데려오면 이번에는 육아의 세계로 출근하는 거야. 저녁을 해 먹고 간식도 먹이고 같이 놀다가 남편이 아이들 데리고 방에 자러 가면 나 혼자 남아. 그때 글도 좀 쓰면 좋은데 이미 몸과 정신의 힘을 다 써버려서 유튜브나 보다 잠들어버리곤 해.


1월은 학교 강사 재계약의 달이라 서류 떼고 지원서 작성하고 면접 보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데 도서관 수업이 계속 연달아 있고, 평소보다 더 일찍 집에 오는 두 아이가 있고, 나는 문득 다 놓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도무지 쉴 틈이 없더라고. 여기서 쉰다는 건, 건전한 생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야. 몰라몰라 졸려졸려 하는 시간 말고.


그리고 오늘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남편과 맛있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 왔어. 커피 향 맡으며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그는 내심 집에서 청소나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데려왔지. 밀린 일기 사흘 치를 기분 좋게 연달아 쓰고 음악을 듣는데 네 생각이 났어. 이 시간에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지난 편지에서 너는 한국에 있었는데. 아직도 네가 런던에 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서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 지금 전화하면 “어 언니!”하고 받아줄 것 같아. (지난번에 보이스톡으로 통화했을 때 정말 가까운 느낌이 들더라!)


너는 항상 내가 제주에 있다는 걸 신기해하고 제주에서 사는 건 어떤지 궁금해했지. 제주에 사는 것에 의미를 두고 최대한 누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여기가 경기도 어디쯤이라 해도 달라지는 게 없을 만큼 평범하게 살고 있어. 일을 하고 사람들 만나고 아이들 사교육에 대해 염려하고 이미 아는 맛집들만 찾아다니는 그런 삶. 새로움을 찾으려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이 없어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는 것 같아.


그런데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네. 나는 네가 영국에서 사는 게 신기하고 궁금해. 고작 두 번 가봤던 런던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그 속에 있는 너를 떠올려. 이층 버스에 오른 너. 타워브릿지를 건너는 너. 세인트제임스를 거닐고 있는 너. 어때? 난 예전의 너를 이해하게 된 것 같아. 반대의 입장이 되니 이런 것만 떠오르네. 집에서 일만 한다고 해도 문 밖은 런던 아니냐며 부러워하는 것까지 똑같지 않니? >_<


영국에서 집을 구하고, 그 집을 채울 것들을 구하고, 또 일자리까지 구하는 너는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인 것 같아. 물론 이런 말이 전혀 와닿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아.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제주도까지 갔냐고 대단하다고 할 때 난 그냥 콧바람이나 뿜었거든. 너의 이주는 나와는 급이 다른 난이도겠지만 어쩌면 비슷한 면도 있는 것 같아. 제주에서 처음 구한 집에서 쥐를 열 마리나 잡았던 게 생각나. 처음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네가 요즘 통과하고 있는 '처음'은 어떠니? 네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으로 영국 회사에 추천서 비슷한 것도 써봤잖아. 이 사람을 고용하지 않으면 너네가 손해라는 말을 고상하게 돌려 썼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이건 우리의 처음이 되겠구나.



하늘이 파랗게 빛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너는 말했지.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드물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누려야 한다고. 창문을 보고 하늘처럼 환해진 너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어. 어지러운 책상을 그대로 둔 채 옷을 걸치고 신나게 걸어 나오는 모습도.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날 것 같아.


기적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그걸 발견하는 자들의 것이 된다고 나는 믿고 있어. 하늘의 색채가 기적으로 느껴지는 삶이 네게 도착한 것처럼, 나도 더 단순하게 감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매일 숙제를 받는 기분이 들거든. 인생에 숙제만 있는 게 아닐 텐데 난 자꾸 한 치 앞만 보게 돼. 내 삶에 이미 와 있는 기적을 나도 좀 찾아봐야겠어.




오늘도 파란 하늘이 네 위에 있기를 빌어.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쓸 수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