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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e Apr 17. 2018

2018년 4월의 경주 마실 (1)

비오는 황남동 봄길을 걷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2005년 수학여행의 경주를 떠올렸다. 싸이월드 사진첩에 잠자고 있을 핫핑크색 재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채도 높은 몇장의 사진들이 기억에 선연하다. 벚꽃축제가 열리는 경주이지만, 사실 나는 그때의 유채꽃 벌판이 보고싶어 충동적으로 경주에 왔다.

핫하다는 황리단길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반쯤 있었고.

그렇게 13년만에 찾아온 나를 경주는 고요히 내리는 봄비로 맞아주었다.


모든 이들의 생애주기에 한 번은
경주가 묻어있다.
-에디터 이지연-




디귿집: 젊은 감각으로 풀어낸 감각적 한옥

도착하니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 주인아저씨가 내려주신 차 한 잔 마시며 경주 부동산 이야기도 좀 듣다가.

뜨끈한 온돌방에 노곤한 몸이 닿으니 바로 곯아떨어져 푹 잘 수 있었다.

첫날 bgm은 윤하의 <빗소리>로 시작.황남동 디귿집.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운치있게 아침을 깨웠다.


이름이 쓰여진 현판을 미리 준비해 주시는 센스. 룰루레몬의 락커룸같다.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UX디자인을 시전중. 나는 이런 것에 약하다. 이것 뿐 아니라 샹달프 잼이나 전등, 컵받침 등등에서 주인분의 센스가 그득그득 묻어있었다. 많은 레퍼런스를 보고 듣고 충실히 반영한 모던한옥.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갖고 있던 국내여행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순간.

키친에서 바라본 앞뜰. 여기서 요가수업해도 좋겠다.
스트로베리 홍차에 우유 조금 넣어서 내 취향대로 밀크티.

빗소리 들으면서 밀크티 마시며 책 읽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경주 골목에서 이렇게 감각적인 숙소를 발견할 줄이야.
블랙 라운드테이블을 연달아 놓으니 음표같다.

체크아웃 후 우리는 우산을 쓰고서 황리단길을 둘러보기로 했다. 여기서 가장 큰 영감을 준 2곳은 대릉원사진관 그리고 어서어서 책방이었는데, UX를 만들고 비즈니스를 꾸리는 우리 둘에게는 배울 점이 많은 공간이었다.




대릉원 사진관: 오퍼레이션의 끝판왕


모던한 사진관의 입구를 보며 심상찮음을 느끼긴 했지만'리노베이션한 동네사진관이겠거니' 했다. 꽤나 인기있는 사진관 같아보여서 '예약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바로 들어와서 찍으란다. 알고보니 이곳은 그냥 사진관이 아니라 준비>촬영>셀렉>출력>인증(바이럴) 까지의 모든 오퍼레이션 과정이 최적화되어있는 '가장 예스러우면서 가장 현대적인 사진관이었다.


최적화된 오퍼레이션: 준비부터 인증까지 15분도 안걸린다. 그나마 셀렉이 조금 오래 걸려 병목이 될 수 있지만, 셀렉을 위한 스테이션을 4자리 마련해둬서 병목을 해소했다. 촬영은 5분도 안걸린다. 그래서 예약을 할 필요도 없고, 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자연스럽게 가게 내부는 인산인해가 되고, 밖으로 줄을 서게 되고, 나같은 사람이 지나가다 기웃거리게 만든다.


흑백사진이라는 컨텐츠: 서비스 전달 과정만 보면 여긴 분명 패스트푸드점인데, 제품 자체만 보면 완전 수제버거다. 이 점이 대릉원 사진관의 기막힌 매력이다.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보이는 아날로그 카메라 소품들, 벽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테이블에 쌓여있는 흑백사진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을 선사한다. 부모님의 낡은 앨범 속으로 걸어들어가 주인공이 되어보라며 손짓한다. 흑백사진의 참으로 영리한 지점은, 아날로그 감성을 극대화하면서도 컬러사진에 비해 다루기 쉽고 안전하며, 규격화가 가능하다는 점. 그래서 포즈도 소품도 머리와 손의 위치마저도 규격화 되어있다. 사진사는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사진을 DB로 찍어날리신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다. '효율'과 '생산' 이 두 단어가 오래된 흑백사진, 아날로그 감성의 동네사진관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다는게 참 재밌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오퍼레이션을 뒷받침하는 기술: 동네에서 증명사진만 찍어봐도 촬영하고 사진 받는데 빨라도 반나절은 걸린다. 반면 여기는 시간과 비용이 오래 걸리는 인화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가정집에서도 충분히 구비할 수 있는 엡손 포토프린터를 선택했다. 이게 가능한 이유도 컨텐츠가 흑백인 덕분이다. 화질은 인화지에 현상한 사진보다 당연히 떨어지지만, 사진 컨셉자체가 '흑백 아날로그'다보니, 포토프린터의 낮은 출력 품질도 쉴드가 쳐지는 것이다(!)


인증샷 구도까지 잡아주는 세심함: 포토프린터에서 바로 나온 따끈한 사진을 건네받고 채 감상하기도 전에, 직원 분께선 사진관 한 켠의 아날로그스럽게 꾸며둔 테이블로 사진을 가져가 예쁘게 늘어놓고선 내게 폰을 줘보라 하신다. 이렇게 찍어서 인스타 프로필 해두면 좋다는 조언을 덧붙이시며(!) 자신의 고객이 어디서 어떻게 노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인스타그램을 200%활용하는 바이럴 마케팅이 오퍼레이션의 마지막단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FM으로 녹아있기란 정말 쉽지 않다.


대릉원 사진관은 요즘 유행하는 4컷사진 포토부스 기계와 사진관 사이의 어디쯤에 포지셔닝하고 있다. 일반인도 하나쯤 DSLR을 구비하며 아마추어와 프로 작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진관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릉원 사진관은 새로운 비즈니스모델과 고객경험을 제시한다.


기술과 컨텐츠와 비즈니스가 만나는 교차점에
폭발적인 가능성이 잠재된 스윗스팟이 있다.

인증샷 찍으라고 친히 세팅해둔 테이블.왠만해선 실패하지 않는 검증된 구도와 시선처리. 포즈 고자라도 사진사의 지시만 잘 따르면 된다. 오퍼레이션의 승리.


잘 나온 흑백사진을 챙겨서 황리단길을 따라 걸어보았다.

필터지에 무심히 써둔 close. 이런 디테일을 좋아한다.
토끼의 귀를 내리니 수많은 토끼 캐릭터들 중에서도 차별화포인트가 생겼다.
공간 관련 책인줄 알았더니 리더십관련 주옥같은 명서였다(!) 하드씽과 더불어 두고두고 곱씹으며 읽고픈 책

굵어진 빗줄기를 피하려 FETE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한시간 남짓 책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kusmi tea 한 잔도 함께. 별 기대 않고 들어갔는데 apartmento 잡지가 무심히 쌓여있고 멋진 아트웍들이 곳곳에 즐비한 감각적인 카페였다. 도대체 이 갬성은 누가 어디서 배워서 가져오는 건가요? 베를린, 포틀랜드 뺨때리게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안목이 많이 성장했음을 느낀다.


부지런한 새가 벌레...아니, 황리단길 까페 명당자리를 잡는다.
킬리언머피가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셀카찍는 나를 보고계신다.
줄서서 먹는걸 무척 싫어하는데 황리단길 음식점은 모두 줄을 서야 했기에, 줄서서 들어간 낭만식당.
젊은 감각을 끼얹은 경주 기념품샵

한국 관광지 기념품이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들 - 어느 절 앞의 구멍가게에서 팔 것 같은 먼지 쌓인 효자손, 부채 (게다가 현금만 받을 것 같은) - 이런 것들도 다 옛말이다. 경주 기념품샵은 핸드메이드 모빌, 컵받침, 파우치, 디퓨져, 와펜과 스티커 등등 디자인적으로 유려하고 구매욕을 자극하는 제품들로 가득했다.

어서어서 책방 한켠의 디스플레이.


어디에나 있는 서점, 어디에도 없는 서점


어서어서 책방은 요즘 다노핏 공간을 기획하는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 곳이다.

비치된 추천책을 열어보면 첫장에 왜 이 책을 주인이 추천하는지가 쓰여져 있다. why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모자라는 것보다 흘러넘치는 편이 더 좋다. 누군가의 신념과 의도가 깔린 공간은 다른 이들도 매료시킨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why를 채워넣을 수 있을까? 다노 추천도서?

책을 파는게 목적이 아니라 책 속의 보석같은 문장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게 목적인 공간 같았다. 우리도 단순히 음식을 파는게, 수업을 파는게 목적인 공간이 아니라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게 목표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책방에 온 사람들은 책은 사지 않더라도 쉬지 않고 셔터를 눌러댄다. 우리 세대에게 폰을 들어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 순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의미다. 공간의 구석구석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놓고 소장하고픈 '소유욕'을 발동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사면 노란 약봉투에 책을 담아서 스티커로 봉해 준다. 책 권수만큼 책갈피도 주고 스탬프로 나만의 책갈피를 만드는 경험도 하게 해준다. 이런 참여감, 이런 행동유발 요소들이 이 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촉발시킬 수 있을까? 그 행동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자신의 장점을 한가지 써내거나, 오늘 하루 감사한 일을 하나 써내면 음료를 500원 깎아주면 어떨까?

책 사는 경험이 이렇게 설레다니.


황리단길을 조금 더 돌다가 너무 추워진 우리는 불국사 근처 한옥민박으로 발길을 돌려 낮잠을 자다가, 느즈막히 나와 옛날순두부와 김치비지찌개를 맛나게 먹었다고 한다.


두 번째 날은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고 대망의 첨성대 옆 유채꽃밭을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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