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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화위복 Jan 08.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소감(스포일러 주의)




슬램덩크 극장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왔습니다. 울컥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은 했지만, 작가의 펜터치로 북산 농구부 5명이 등장하는 오프닝 장면부터 눈가와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어떤 슬램덩크 관련 창작물보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손길이 많이 닿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원작자의 의도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느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작품 의도는 원작『슬램덩크』에서 산왕전 에피소드를 빌려서 '농구란 이런 스포츠다' 라고 작정하고 말하는, 극한의 사실주의 농구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산고 5인방 중 원작에서 가장 서사가 적었고 비인기 캐릭터에 가까웠기 때문에, 뜬금 없는 결정으로 느껴졌던 송태섭의 주인공 채택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송태섭의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는 '코트위의 사령관'이라 불립니다. 볼을 가장 많이 만지고 패스를 통해 팀원들의 플레이를 살리는 플레이메이커(Playmaker)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농구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과 북산의 공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포인트 가드인 송태섭의 시선에서 산왕전을 그립니다.




나머지 4명의 공격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시점에서 농구 경기가 그려지니, 원작에서 만화책이라는 매체의 제약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농구의 면모'들이 보이게 됩니다. 평소 농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만화책에서의 송태섭은 존재감이 드러나는 장면이 다른 4인방에 비해 적기 때문에 크게 하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송태섭은 강백호처럼 가공할 운동 능력으로 리바운드를 잡아낸다거나, 정대만처럼 폭발적인 삼점슛을 성공시키지도 않습니다. 서태웅처럼 화려한 득점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채치수처럼 파워풀한 골밑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라면 농구에서 포인트 가드가 코드 반대편에서 상대의 압박을 뚫어내고 우리 팀의 공격 코트까지 볼을 운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히 느껴집니다. 게다가 송태섭은 자신보다 훨씬 사이즈가 큰 이명헌의 신체적인 압박을 경기 내내 달고 다닙니다. 송태섭의 성장기에 형과의 1 on 1을 즐겼던 장면이 삽입된 것도, 어린 시절부터 송태섭은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상대했던 것에 익숙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어렸을 때 부터 아버지와 1 on 1을 해온 산왕 정우성과도 동일한 성장 환경입니다. 기존 애독자에게 조금 뜬금없게 느껴지는 장면이 송태섭과 정우성이 미국에서 상대 팀으로 만나는 결말입니다. 하지만 두 선수의 동일한 농구 성장 배경과, 정우성이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겪는 어려움을 '사이즈'로 표현한 점에서 작가는 농구에서 신체적인 핸디캡을 이겨냈을 때 선수의 역량이 더 성장한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6cm나 크지만 결코 느리지도 않은 이정환도 상대했던 송태섭




'팀 스포츠'로서의 농구의 면모도 영화를 통해 더욱 극대화 됩니다. 채치수의 스크린을 받은 정대만이 오프더볼 움직임을 통해 슛 찬스를 만들고, 그 찰나의 순간에 맞춰 송태섭의 패스가 나가며 공격이 성공합니다. 실패를 대비하여 강백호는 공격 리바운드 준비를 합니다.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1인칭 시선과 영화라는 영상 매체를 통해서 한 번의 슈팅 찬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는 팀원들의 호흡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흥행을 위해 인기가 높은 강백호나 정대만을 주인공을 채택 했더라면, 이런 팀 플레이 장면들 보다는 두 명의 하드캐리 장면 묘사에 비중이 더 높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만화책의 산왕전을 기억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강백호와 정대만이 미쳐서 이긴 경기'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는 영화를 통해 산왕전을 이러한 영웅적인 스토리에서, '팀 스포츠' 농구 만화로 재탄생 시킵니다. 사실주의 농구 만화를 그리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 예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특정 색채가 강한 영화이기 때문에, 갈리는 '호불호'는 어쩔 수 없습니다. 농구 자체에 주목을 하다 보니 만화책 만의 감동적인 명장면들이 지나치게 담백해 지거나 생략, 삭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삼점슛을 폭발시키며 정대만이 쏟아낸 각종 명대사들의 임팩트가 매우 약해졌습니다. 경기 내내 신현철에게 털리다가 승부처에 혼을 담은 채치수의 마지막 블로킹도 그냥 '블로킹 1' 처럼 담백하게 지나갑니다. 변덕규의 '도미와 가자미'론이나 슬램덩크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강백호의 '정말 좋아합니다' 등의 명대사들은 경기의 긴박한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졌는지 통으로 편집 되었습니다. 강백호가 전반전에 자신보다 훨씬 큰 신현필을 극복하여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장면이나, 조재중 에피소드가 삭제 되다보니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선 강백호의 부상 사실을 알면서도 교체하지 않은 안 감독의 태도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소 진부한 스토리의 송태섭의 서사를 담을 바에는 기존의 명장면들을 살리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이해가 가는 지적입니다.




이 명장면을 산왕전을 묘사한 극장판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실화?




원작에서 가지고 있었던 송태섭의 고유의 캐릭터성이 변하게 된 점도 아쉽습니다. 원작에서 송태섭은 능남전을 제외하면 항상 자기보다 크면서 괴물같은 포인트 가드들을 상대해 왔습니다. 상대한 선수들의 유형도 다양합니다. 왼손잡이에 빠른 슈팅 릴리즈로 득점력까지 갖춘 듀얼 가드 김수겸, 르브론 제임스를 연상하게 하는 이정환, 사이즈와 슈팅력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나대룡, 정통 포인트 가드이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을 갖춘 이명헌 등 각자 개성 넘치면서 기량이 차고 넘치는 포인트 가드들을 상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태섭은 항상 그들에게 겁먹지 않은 깡다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정신력 때문에 그렇기에 산왕전에서도 강백호와 유이하게 경기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송태섭의 개인적인 서사가 추가되는 바람에 이러한 송태섭만의 깡다구 묘사가 다소 희석된 감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불호적인 요소들을 감안하더라도 결론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평가는 '호'입니다. 먼저 농구라는 매력적인 스포츠를 현재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최대치로 활용하여 이끌어낸 점이 눈에 띕니다. 농구 경기 중계에서도 담을 수 없는 농구 코트에서 벌어지는 박진감이 제대로 묘사되었습니다. 또한 원작의 스토리보다 농구 경기에 초점을 맞춘 덕택에, 차기 극장판 후속작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작의 산왕전 에피소드는 말 그대로 연재 내내 쌓아온 스토리와 작가의 역량을 총 집합한 마무리 에피소드 입니다. 따라서 원작 스토리에 충실하여 더 감성적으로 만들었더라면, 산왕전을 능가하는 극장판 후속작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농구 경기 자체에 집중하는 현재대로라면 산왕전과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능남전도 충분히 극장판 후속작으로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속작은 능남전 에피소드로 나오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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