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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키고 얽힌 털들

유은 / 반려종의 시선 1장. 사랑과 돌봄에 대하여

   모든 생명체들에게서는 나선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DNA, 덩굴식물, 고동껍질, 뱀의 똬리…. 나선의 형태를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나선형의 창발성은 행위들의 반복과 마주쳤을 때 거대한 규모의 팽창과 가속을 가능하게 한다. 태풍의 이동, 놀이터에 자리한 나선형 미끄럼틀, 청계천에 놓인 <스프링> 조형물, 나선형 교차로 등. 나선형의 꼬인 형태는 한정된 공간에 많은 양을 압축하기에도 용이하다. DNA 실가닥은 꼬일 수 있을 만큼 꼬임으로써 초소형 세포핵 안에 응축된다¹. 무작위로 엉켜 보이는 DNA는 언제고 자가 복제를 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엉킴 속의 질서가 만들어 내는 무한생장의 가능성은 경이롭기도, 한편으로는 섬뜩하기도 하다.


   창발하는 사건들과 이를 마주하고, 기억하고, 반응하는 몸의 메커니즘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다. 무언가가 벌어지고, ‘나’는 그저 그것을 보고, 듣고, 맡고, 먹고, 느끼며, 흐느끼고, 역겨워하고, 웃고, 즐기고, 분노하며, 마주하고, 회피하고, 개입하고, 방치한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런 난잡한 것들, 하지만 분명 어딘가-나를 세포 크기만큼 축소해 분석할 수 있는 시점의 어딘가-에서는 그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떠올린 것들의 나열이다.


   폐비닐을 모아 꼬다 보니 실이 되었다. 버려진 것들은 그 곳에서 새로운 형태를 가꿔 나간다.


   폐비닐을 모아 이런저런 형태 실험을 해온 지 1년이 되어 간다. 처음에는 폐비닐을 잘라 실을 만들어 손이 가는 대로 코바늘 뜨기를 했다. 그 형태는 손의 반복된 동작이 쌓여감에 따라 길어지고 부피가 커졌다. 노동집약적인 시간과 행위가 모여 만들어진 흰색 덩어리는 비체(abjection)²를 연상케 했다. 쓸모를 다 하고 나면 버려지거나 서랍에 박힌 채 주체도 객체도 아닌 어떤 상태에 놓였던 것들이 나의 무작위적인 손동작의 반복과 얽혀 어떤 형상을 이루며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폐비닐 뜨기는 의도된 형태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알이나 고치를 떠올리며 구 형태를 주로 만들었다. 인간 손의 의도와 설계를 가득 담고자 한 시기라고나 할까. 구체 안에 무엇을 담아 속을 채울까 고민하다 비닐 실이 되지 못한 짧은 비닐 부스러기, 재질상 실이 되기 어려운 비닐들, 이전에 플로깅 하다 수집한 폐기물 일부를 넣기도 했다. 내가 상상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잠재태로서의 알, 고치의 모양이었다. 아직 ‘무엇'으로 규정되기 전, 언어 이전의 상태를 상상했다.


   최근에는 비닐실 만드는 방식 자체를 다르게 해 그 과정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기존에는 비닐이 연결되도록 자르는 방식으로 실을 만들었다면, 최근부터는 비닐을 꼬아서 얽히도록 해 더 탄탄한 실을 만들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비닐봉지를 잘라 영매듭 모양의 비닐 조각들을 만든다. 비닐 조각 하나를 코바늘 양쪽에 건다. 코바늘 한쪽의 비닐을 시계방향으로 회전시켜 비닐 절반을 전체적으로 모두 꼬이게 한다. 다른 쪽의 비닐도 같은 방향으로 여러 번 회전시켜 나머지 부분도 전체적으로 꼬인 상태가 되게 한다. 양쪽 모두 충분히 꼬인 상태가 되면 두 끝을 모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양쪽 실이 얽히게 한다. 새로운 비닐 조각을 고리에 걸어 연결한 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코바늘에 걸린 실을 반복적으로 꼬고 새로운 조각을 연결하는 가운데 튼튼한 비닐실이 점점 더 길어진다.


   타래


   폐비닐에 대한 관심은 점차 실적인 것들의 얽힘과 얽힘으로써 형성되는 모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반려묘 밤비의 털뭉치, 파스타면, 라면, 비빔국수, 식물의 가지와 뿌리, 두뇌의 구불구불한 모양, 허공과 지층, 일상 공간 곳곳을 잇는 전선줄…. 밤비의 털뭉치는 손으로 비빌수록 점점 더 압축되어서는 덩어리가 된다. 면은 제각기 모양새가 다르지만 수분과 열감에 의해 풀어지고, 도구의 휘적임에 의해 각종 양념이 몸에 스민다. 포크나 젓가락의 회전에 따라 소용돌이가 형성되고 무작위적인 면들이 건져 올려진다. 식물은 삶의 연식이 쌓일수록 가지와 뿌리를 뻗고, 두뇌는 점점 더 촘촘하게 주름을 가꿔나간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꼬인 선들의 형태들로부터 나는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꼬임의 출발점을 찾아 나서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원점을 찾아 나서는 순간, 출발의 출발, 그 출발의 출발점을 찾아 헤매는 마치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은 여정이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재 엉킴 혹은 얽힘으로 감각되는 기억들의 꼬리를 물어 가며 삶의 실타래를 있는 그대로 가늠해 보고자 하는 것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엉키고 얽힌 집


   독립한 지 10년이 넘어간다. 나의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 대한 지향점이 차츰 분명해져 가는 중이다. 물론 머리와 몸이 동기화되는 데 걸리는 시차들로 인해 너저분한 일상을 보내는 날들도 적잖이 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일상에서 자기돌봄을 잘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적신호들을 포착하는 어느 정도의 기준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1. 바깥에 나가거나 운동을 하지 않는 날이 지속된다.

   2. 혼술을 하다 취해 잠든다.

   3.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 특히 마라샹궈와 버섯 꿔바로우를 시켜 입에 욱여넣듯 먹

        고 있다면 그것은 명백한 적신호다.

   4. 바닥 청소를 하지 않아 밤비의 모래와 털들이 쌓이거나 밤비가 토한 흔적이 바닥에 

        남아 있다.

   5. 식물들이 마른 잎을 떨군다.

   6. 책상이나 싱크대 등에 빈 공간이 적어진다.

   7. 화장실 바닥에 녹이 생긴다.

   8. 모르는 사이에 두피의 각질을 뜯는다.


   적신호들을 명확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최근에 위 7가지 현상을 모두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를 감지하고서 포스트잇에 ‘정리정돈, CLEANING’을 써 책상에 놓인 스탠드 커버 위에 붙인 날은 아마도 추석 당일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께 추석에 꼭 뵈러 가겠다고 했던 계획과 달리, 나는 추석 내내 책상 앞에 앉아서 대학원 과제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발제해야 하는 텍스트를 정리해야 했다. 텍스트를 읽고 정리하고, 추가적인 자료들을 찾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나도 안다. 그것들이 순전히 핑계라는 것을.


   매년 두 차례씩 찾아오는 한국의 대명절인 설과 추석 연휴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지 않은 햇수가 점차 쌓여가고 있다. 언제부터였던가. 아마도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보도된 후, 내가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때부터였을 거다. 생물학적으로 나보다 2년 먼저 지정 성별 남성으로 태어난 E, 그와 아빠는 n번방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어느 지점에선가 해당 사건이 모든 남성을 잠정적 가해자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들의 자위적이고 기만적인 언어들에 분노해 식사를 다 마치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은 나의 행동을 비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화가 나 소리를 지르며 욕설과 함께 분노를 표출했다. E는 방문을 열고 문간에 서서 나를 비난하며 “메갈”, “정신병” 등을 운운했다. 나와 E의 말다툼이 심해지는 와중에 아빠는 내게 행주를 던졌다. 엄마는 그만하라며 소리쳤다. E는 내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본가를 나왔다. 다행인 것은 내게 도망칠 수 있는 나의 공간이 있었다는 거였다. 거기서 오롯이 홀로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위안과 동시에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1년 정도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기존에 살던 공간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해야 할 즈음이 되었을 때 부모님과의 관계는 구렁이 담 넘듯 회복했다. 어떠한 사과나 당시를 돌아보는 대화를 나누는 틈 없이. 그들과의 관계는 늘 그랬다. 어떤 것에 주체할 수 없는 짜증과 온갖 분노, 미운 감정들을 눈물과 때리기와 던지기 등으로 표출하고서는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같이 밥을 먹고 피식하는 웃음으로 넘겼다. 어쩌면 그런 방식의 화해(?)가 누적되어 지금의 두터운 벽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다. 왜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참, 나는 이혼가정에서 자랐다. 아빠는 생부이고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1~2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함께 살았다. 영유아기에 대한 기억은 파편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데 파편마다 장소가 다르다. 놀이터에서 친구들에게 “아빠가 엄마(생모)를 때렸대”라고 말하는 장면(이때는 아마 아빠와 생모가 같이 살았을 거다), 개 두 마리가 함께 있었던 생모의 엄마 집, 노년의 할머니가 함께 계셨던 아빠의 첫째 형제 집, 생모의 집, 아빠의 친구 집, 엄마의 동생 집 등. 다양한 집들에 맡겨진 나는 이유 모를 호의와 각기 다른 형태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존했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특정한 이미지가 자리잡힌 것은 아빠와 엄마,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 E, 이렇게 다섯이 함께 살기 시작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다. 할머니는 부모님이 맞벌이하는 동안 나와 E를 돌보아 달라는 엄마의 요청에 따라 공주에서 하시던 개인 장사를 접고 오신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와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함께 살았다. 엄마와 아빠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나는 ‘질질 짜고, 예민한’ 아이였다. ‘OO한 아이’라는 프레임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여정은 나에게 있어 평생에 걸쳐 벌여야 하는 내적 투쟁의 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와 별개로 엄마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라는 말과 함께 처음으로 나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나, 생모가 나와 E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 후 몇 번 정도 집 앞 놀이터에서 만났을 거다. 당시 생모와의 만남은 가족에게 비밀이었다. 놀이터에서 생모와 같이 있던 장면이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러다 겁에 질려 우는 나와, 엄마와 엄마 쪽 형제들이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이후로 생모는 내게 더 이상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렸을 적에는 아빠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아빠는 종종 생모를 의부증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곤 했고, 싸우는 날이 평화로운 날보다 많아져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생모의 선택들에 대해 본인이 납득할 수 없었던 지점들을 간간히 덧붙였다. 아빠는 지금의 엄마를 만나 평화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어 좋다고 했다.


   E와의 관계는 뭐랄까. 내게는 E가 지구에서 소멸했으면 하는 마음과 무탈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은 그에 대해 궁금한 것도,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도 전무하다. 이 응어리가 나로 하여금 다른 관계들에 있어 어떤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E는 나와 같이 어릴 적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시기를 보냈다. 추측건대, 그 시절의 나와 E는 모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는 나대로 ‘예민한’ 기질을 내세워 모든 것들을 뾰족하게 마주하며 성장했다. 종종 E의 팔에 얼룩덜룩 멍이 남도록 꼬집어 분을 풀기도 했다. E는 글쎄. 그는 나를 때렸다.


   2020년 갈등 이후 두 차례 그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날 이후 나와 E는 모부님을 따로따로 만났다. 특히 나는 그가 없는 날 본가에 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그것을 암묵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부모님/아빠와 E의 생각은 달랐던 거 같다. 첫 번째 마주침은 내 생일에 일어났다. 나는 엄마의 초대를 받아 본가에서 생일맞이를 했다. 밥을 먹은 후 쉬는 와중에 누군가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E였다.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케이크 포장 상자를 들고는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두 번째 마주침은 1년 정도가 지나고서였던 거 같다. 역시나 엄마의 초대로 쉬는 날 본가에 갔다. 이번에는 E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내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당황스러움과 분노, 원망이 섞인 표정을 본 엄마는 “나도 몰랐어"라고 했다. 이날은 넷이서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빠와 E는 어떤 대화와 낄낄거림을 이어갔다. 나는 불현듯 화를 냈다. 그러자 아빠는 “다 나가"라며 식탁 의자를 던졌다. 엄마는 아빠를 말렸고, 나와 E는 밖으로 나가 근처 벤치에 앉았다. E는 내게 엄마와 아빠를 가스라이팅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가족처럼 지낼 수 없냐고 했다. 엄마, 아빠도 이제 늙어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 자체가 불편했고 기이했다.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E에게 화해하고 싶어서 온 거냐고 했고, 그럼 그냥 좋게 끝내자고 하며 기괴한 대화를 마쳤다. 나와 E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다 같이 마저 식사를 했고, 각자의 방에서 잠을 잤다. 화목하게, 가족처럼. 다음날 나는 엄마와 아빠, E와 인사를 나누고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나는 본가에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내가 꺼내고 싶은 일화들만을 거칠게 편집한 러프컷에 해당한다. 내가 행한 비열하고 추한 행위들은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자기 객관화를 명분으로 자책하기보다 나를 찌르는 조각들을 어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엄마는 자신이 다니던 회사와의 관계가 안 좋아졌고, 그때부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회사와 엄마 사이에 법정 다툼이 이어졌다. 아빠는 엄마의 재판을 보조하기 위해 자신의 직장을 불안정하게 이어가야 했다. 살던 집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었고, 기존 가구들은 짐짝이 되어 좁아진 집 한켠을 빽빽하게 채웠다. 각종 문서와 서류 파일들이 집 안 바닥 이곳저곳에 쌓여갔다. 재판은 상고심까지 갔다. 엄마는 패소했고, 그에 대한 책임들을 져야 했다. 나는 공부하고자 했던 전공 대신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의 전공을 선택해 들어갔다.


   지금은 엄마와는 비교적 지속적으로 연락하지만, 아빠와는 아주 가끔 안부 정도 나눈다. 엄마는 종종 반찬을 한가득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곤 한다. 각 반찬통은 비닐봉지로 칭칭 감싸져 있다. 엄마의 반찬을 받아먹는 횟수가 늘어가는 만큼 집에는 쌓여가는 폐비닐 개수가 늘어간다. 나의 행동들이 엄마와 아빠에게 어떤 형태로든 생채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조금이나마 나 때문에 아팠으면 좋겠다.


   일시적 마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밖에서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굳이 떠올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현재의 나를 잘 이루어 살고 싶었다. 가족에 대한 원망이나 성인이 되기 전까지 누적되어 왔던 불안정함이 나의 현재에 영향을 끼친다는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언어를 부정하고 싶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남근주의적 언어³에 기대고 싶지 않았고, 과거에 귀속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과한 음주와 더불어 짙은 방황하는 시기를 가졌다. 밤새 술을 마시고 화장실과 길가에서 잠드는 날들, 괴상하고 불편한 옷을 껴입고서 헤테로 여성성을 드러내려 애쓰던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는 관계 맺기에 있어 저지르는 실수들, 휴⋅복학 등을 거치며 오롯이 ‘나’의 안위에 국한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던 시기였다.


   오롯이 나의 의지로 하루하루를 자유롭게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던 기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의 사건, 이후 벌어진 사건에 대한 국가 폭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듯 나에게 충격적이고 처참한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간 내가 지녀 왔던 개인적 고민과 삶의 경계는 순식간에 뜯겨졌다.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와 강남역 살인 사건, 미투 운동 등 일련의 젠더 의제들을 마주했다. 나는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래디컬하게 분노했고, 함께 공부하고 행동했던 이들과 논쟁을 벌이다 그 집단을 떠났다. 잠깐의 마비.


   2020년 코로나 시기, 대안 교육기관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은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적녹보 패러다임’이라는 명칭 아래서 맑스주의를 중심으로 노동, 생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는 곳이었다. 강사들은 거의 시스젠더 남성이었고 맑스의 계보를 중시하는 환원주의적인 경향이 종종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뇌가 저리도록 글을 읽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다 기관에서 믿고 의지하던 한 강사가 학생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즉시 퇴출당했다. 기관은 사건을 기점으로 분열했다. 집단 문화를 돌아보고 해결하기 위한 이들과 휴학하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한 발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 등. 나는 성급한 적극성을 들이밀며 집단 문화를 해결하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혔고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리고 집단을 떠났다. 또다시 잠깐의 마비.


   매듭짓기


   나를 마비시켰던 각 사건의 독성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몸으로부터 빠져나갔다. 나는 몸을 일으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말을 떼고, 무너진 조각들을 주워 새로이 쌓았다. 쌓기를 시도하다 다시 무너뜨리기를 반복한다. 아슬아슬하고 거칠고 모난 조각들, 흐느적거리고 끈적하고 비린내가 풍기는 조각들이 여전히 즐비하다. 왜 다시 이 조각들을 짚으러 돌아왔을까. 무엇을 마주하고, 무엇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걸까. 매듭짓지 못하고 끝난 것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다는 마음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내게는 안정적인 관계에 대한 애착과 불안정한 존립에 대한 욕구가 공존한다. 사랑에 대한 갈망 앞에서 이를 짓무르게 하고픈 파괴욕이 고개를 들이민다.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 잘 죽고 싶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기제들 앞에서 분노하거나 당황하거나 겁내지 않고 싶다.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의 나를 가두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다시 비닐봉지를 꺼낸다. 지난 며칠간 배달시키며 쌓인 봉지들이다. 간단한 도구와 단순한 손노동을 반복하며 비닐실을 만들어 간다. 쌓인 것들을 내 방식으로 얼기설기 얽는다. 나름의 질서를 부여한다. 헝클어뜨린 채 방치했던 관계의 실타래를 함께 꺼내 본다. 실마리를 잡고서 한 올 한 올 풀어본다. 실 끝을 상상해 보지만 여전히 그려지지 않는다. 일단 앞에 놓인 실마리에서 이어지는 실들부터 매듭을 새로 묶기 시작한다. 어떤 단순한 규칙을 습득해 묶는다. 매듭에는 각기 다른 이름들이 있다. 합장매듭, 도래매듭, 날개매듭, 단지매듭, 안경매듭, 8자매듭 등. 매듭의 용도 또한 다르다. 장식을 위한 매듭이 있다면, 생존에 필요한 혹은 생활 용도로써 사용하는 매듭이 있다. 내가 풀어내고자 하는, 동시에 매듭짓고자 하는 관계의 이름은 무엇일까. 굳이 이름을 지어야 하나?


   시각예술작가 세실리야 비쿠냐(Cecilia Vicuña, 1948~)⁴는 고대 안데스 매듭문자 체계인 키푸(quipu)에 착안해 거대한 섬유를 활용한 설치와 퍼포먼스를 한다. 버려진 것들을 수집해 불안정한(precarious) 조각 설치를 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시적 저항’을 통한 예술적 연대의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것에 대한 ‘올바름’의 정의를 내린 상태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 느슨한 정의 혹은 미정의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들이 가진 힘에 대해 떠올려 본다. 폐비닐과 관계가 주변의 얽힌 사물들에 대한 관찰로, 종을 가로지르는 생명들의 창발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듯, 사유의 궤적을 느슨히 하지만 섬세히 더듬다 보면, 내가 폐기하고자 했던 기억의 자리를 새로이 살필 수 있지 않을까.


-

유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행위와 선택들, 그로부터 이어지는 생과 사,

생산-소비-폐기/분해 등 인간과 인간-너머의 세속적 얽힘의 과정에 관한

수행적 리서치를 기반으로 다종다양한 존재들이 임의적 경계를 해체하고

상호의존의 실질적 확장을 이룰 수 있는 사건의 장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비가시화되고 가려진 존재와 서사에 대한 다중적 감각의 확장과

교차성에 기반한 상호돌봄을 위한 실천을 지향한다.



1 사람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 1개의 길이는 2m에 달한다. 인간의 DNA를 모두 연결하면 그 길이가 명왕성에 도달할 정도다. 하지만 이 긴 물질은 크기가 고작 2~4㎛(마이크로미터·1㎛는 100만 분의 1m)인 세포핵 안에 저장된다. (동아사이언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19169)


2 아브젝시옹(abjection)은 라틴어 abjectio를 어원으로 한다. 이는 “ab-”와 “jectio”로 구성된다. 접두사 ab-는 공간적 간격・분리・제거를, jectio는 내던져 버리는 행위를 뜻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울:동문선, 2001. 319쪽 참조)


3 두 학자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다. 다른 문헌들에서 종종 대두되는 ‘남근’ 비유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 그들의 저서를 펼치고 싶지 않게 한다.


4 작가 홈페이지, http://www.ceciliavicu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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