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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르보 Jul 01.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육아휴직을 낼 것이다.

아빠 육아휴직에 대한 소회

작년까지는 내가 집에 돌아오면, 둘째 딸이 현관 중문을 열고 나를 반겨주곤 했다. 당시 세 살이었던 둘째는 손만 흔드는 게 서툴러서 온 팔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런 둘째의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둘째도 안 나온다. 첫째는 자랑할 게 있는 날에만 뛰어나오고, 둘째도 자기 할 일을 하느라 항상 바쁘다. 모 코미디 유튜브 채널에서처럼 "아빠가 오면 인사를 해야지이~" 하고 강요를 해야만 인사를 해준다. 그러고 나면 나는 최대한 오버하여 "고뤠!" 하고 인사를 받아준다.


3년 전인 2018년 4월, 나는 둘째가 태어난 후 첫 육아휴직을 냈다. 출산휴가와 연차까지 붙여서 총 3개월 동안 회사를 쉬었다. 그리고 와이프와 함께 두 아이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며 휴직의 취지에 맞게 충실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복직 후 한 차례 진급 누락의 아픔을 겪긴 했지만, 이듬해 진급했고,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직장은 조직 문화가 군대를 연상시킬 만큼 수직적인 곳으로 알려진 대기업이다. 그런 곳에서 나는 과장 진급 연차인 대리 4년 차 때 육아휴직을 냈다. 연구소에서는 아빠 육아휴직 케이스가 더러 있었지만, 내가 속한 본사 본부에서는 당시 내가 처음이었다. 경력직 입사자라 사내 인맥이 많지 않았는데, 육아휴직을 낸 덕에 수백 명이 근무하는 본부 안에서 꽤나 유명한 직원이 되었다.


2019년 4월. 둘째의 첫 돌. 자세히 보면 아이를 붙잡고 있는 와이프의 손이 보인다.


지금도 그렇지만, 3년 전만 해도 육아휴직을 실천하기까지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둘째가 생기면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와이프에게 공언했지만, 막상 출생이 다가올수록 실천할 자신이 없어졌다. 한 번은 직장 동료에게 육아휴직에 대해 떠봤더니, 내가 우리 회사의 전설이 될 거라나 뭐라나? 육아휴직을 내어 튀는 존재가 되는 게 두려웠다. 회사에서 온갖 명분을 만들어 내게 고통을 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육아휴직 말고 퇴사를 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실천했다. 내가 '선택받은 직장'에 다녀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한 것이다. 첫째가 태어난 후 두 달 동안 밤새도록 고생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고생을 아이가 하나 더 있는 상황에서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집이 좁아서 입주형 베이비시터를 들이기 어려웠고, 양쪽 부모님 댁이 멀어서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결국, 나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두 개뿐이었다. 맞벌이인 와이프에게 독박 육아를 시키거나, 와이프와 공동 육아를 하거나... 전자를 택하는 건 육아휴직을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2019년 10월. 나 혼자 아이 둘 데리고 장 본 날. 첫째도 카트에 태우는 꼼수를 써야 했다.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말한 시점은 출산 예정일 한 달 보름 전이었다. 의외로 팀장님, 실장님, 인사팀장님 모두 아이를 잘 돌보고 오라며 나의 육아휴직을 승인해 주셨다. 마침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워라밸 등의 키워드가 화제가 된 시점이었던 터라 더욱 수월하게 육아휴직을 냈던 것 같다.


그리고 육아휴직을 시작한 시점은 와이프와 둘째가 산후조리원을 퇴소한 날이었고, 이후 나는 매우 루틴 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바로 돌아와 가사와 육아를 분담했다. 둘째가 잠들면 세 가족이 함께 쪽잠을 자기도 했고, 때로는 와이프와 내가 번갈아가며 외출하여 잠시나마 자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후 네 시쯤 되면 다시 어린이집으로 가서 첫째를 하원시켰고, 놀이터에서 첫째와 좀 더 놀다가 집에 들어갔다. 좁은 집에 아이가 둘이나 있으면 그 존재들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가급적 밖에서 첫째와 시간을 더 보내야 했다. 밤 10시 정도가 지나면 와이프는 첫째를 재웠고, 나는 다른 방에서 둘째와 심야 육아를 시작했다. 적어도 와이프의 밤잠만큼은 철저히 보장시켜 주는 것이 내 육아휴직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사실 한 달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이런 단조로운 생활에 점점 지쳐갔다. 나는 집돌이 기질이 강한 편인데도 집과 집 주변에서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다 보니 우울해졌다. 아무리 해도 끝이 없고, 끝없이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육아와 가사는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솔직히 나도 전업주부들의 삶이 속된 말로 '꿀 빠는 삶'인 줄 알았는데, 직접 해보니 '감옥 같은 삶'이 될 수 있겠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다행히 둘째는 내 팔베개가 좋았는지 생후 40일 즈음부터 통잠을 자기 시작했고, 나도 둘째 통잠 재우기 미션을 완수한 후, 예정대로 회사에 복귀했다(이후 둘째는 돌 때까지 내 품에서만 잤다). 회사에서는 모두들 나의 복직을 반겨주었지만, 며칠 후 나온 내 상반기 고과는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다섯 단계 중 맨 아래, 즉, 바닥이었다. 평가란에는 한 마디도 쓰여있지 않았다. 하반기에는 약간 만회했으나, 결국 그 해 과장 진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당시 마음은 가벼웠다. 어차피 인사 적체가 심해 육아휴직을 내지 않았더라도 누락됐을 거라고 정신승리를 했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근무지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본사에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육아휴직을 냈던 사실을 빨리 잊었다. 역시 사람들은 그다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2019년 10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붉게 물드는 한강공원에서.


주 52시간 근무제도 시행되고, 저출산 문제와 함께 밀레니얼들의 목소리가 존중받게 되면서 남성의 육아휴직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실제로 복직 후 같은 본부에서 육아휴직을 쓴 남성 직원이 두어 명 더 생겼고, 회사에서도 남성 직원의 출산휴가 제도를 개선했다. 기존에는 출산휴가가 출생 당일부터 5 영업일이 아니라 5 연속일이었는데, 이제는 최소 10 영업일, 즉 2주 이상의 출산 휴가를 강제로 보내주고 있다. 그 휴가를 출생 당일이 아니라 출생 후 90일 이내 원하는 시점에 쓸 수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비교적 조직 문화가 올드한 우리 회사도 이렇게 바뀌었으니, 머지않아 다른 더 올드한 회사에도 이런 문화가 정착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물론, 여전히 아빠 육아휴직은 흔하지 않고, 오히려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일이며, 필연적으로 대가가 따른다. 법적으로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이익을 줄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동기나 후배가 먼저 진급하는 걸 멋쩍은 얼굴로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존심보다 가정을 택했다. 조금 유난 떠는 아빠가 아닌, 최소한 평균적인 맞벌이 엄마 수준의 육아 가사를 맡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첫째가 초등학교에 진학할 때 한 번 더 육아휴직을 낼 것이다. 어차피 회사에 충성해봐야 결국 마지막에 돌아오는 건 노란 봉투뿐... 나는 현재의 가정에서 소박한 풍요로움을 즐기고, 맞벌이 중인 와이프와 두 아이들의 영광스러운 꿈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함과 동시에, 내 커리어의 플랜 B를 항상 그려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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