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한겨레 아동문학 작가교실 71기 문집 수록
“엄마, 내 옷 어때?”
“티셔츠에 김칫국물 묻었네. 칠칠찮기는. ”
역시 엄마다.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얼룩을 찾아냈다. 얼른 셔츠를 갈아입었다. 오늘은 새 학교에 가는 첫날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1년 내내 아이들이 나를 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옷도 깔끔, 머리 모양도 깔끔, 신발까지 깔끔하게 만반의 준비를 했다.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힘차게 등굣길에 나섰지만 학교가 가까워지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같이 학교 갈 친구가 있다면 조금은 덜 두려울 텐데.
드디어 6학년 1반 교실 문 앞이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교실 문을 드르륵 여는데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아, 안녕. 내 이름은 장선우야.”
어색해서 이름만 얼른 말했다. 그런데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아이가 느닷없이 나더러 아파트 몇 평에 사냐고 물었다.
“으응? 아파트?”
갑자기 말문이 콱 막혔다.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니 여기저기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피하고 애써 무시했는데 이번엔 여자친구는 있냐고 물었다.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쩔쩔맸다. “모솔(모태솔로)인가 봐.”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나는 가방에서 공책과 필기도구를 꺼내며 바쁜 척을 했다.
1교시는 첫날이라 자기소개를 했다. 내 첫인상을 바꿀 절호의 기회다. 나는 어제저녁 진진가 게임으로 미리 내 소개를 준비했다. 이 게임은 진짜인 문장 두 개와 거짓인 문장 한 개 속에서 거짓인 문장을 찾는 것이다.
내 혈액형은 A형이다.
2. 나는 신 것을 잘 먹는다.
3. 어릴 적 꿈은 축구선수다.
우리 식구들은 부모님과 남동생까지 모두 A형이다. 1번은 “우리 집 식구들은 B4가 아니라 A4예요.”라고 말하며 웃기려고 준비했다. 또 내가 어릴 때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3번을 썼다. 아이들은 무조건 운동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니 말이다. 거짓은 2번이다. 신 건 딱 질색이다. 나는 단 걸 좋아해서 달콤한 남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세 문장을 주고 거짓인 문장을 맞춰보라고 하자 한 여자아이가 말했다.
“A형은 딱 맞는 거 같아. 원래 A형 남자들이 내성적이거든.”
아이들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망했다. 내가 아까 우물쭈물한 게 벌써 내성적인 게 되어 버린 모양이다. 이번엔 다른 여자아이가 2번에 대해 말했다.
“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잘 먹는데.”
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 말은 내가 어린애란 말인가! 이번엔 또 다른 남자아이가 말했다.
“3번이 가짜 같은데? 몸이 가느다래서 좀 허약해 보여.”
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끄덕끄덕했다.
유머 있고, 운동 잘하고 달콤한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내성적이고, 어리고 허약한 남자만 남았다.
“내 혈액형은 A형이고, 어릴 때 꿈은 축구선수였어. 2번이 가짜야. 난 신 것을 싫어해.”
더 자세한 설명은 온데간데없이 이렇게 소개를 끝냈다. 첫인상 바꾸기 완전 실패다.
2교시는 수학 시간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바로 수학이다. 내 별명이 수학의 신이라는 걸 아이들은 모를 것이다. 첫인상을 만회할 기회다. 수학책을 펴고 순식간에 일고여덟 문제를 내리 풀었다. 고개를 들고 교실을 휘 둘러보자 아이들은 모르겠는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제야 아이들이 내가 수학의 신이라는 것을 깨닫겠구나!’
아홉 번째 문제를 풀 때, 내가 문제 푸는 것을 계속 쳐다본 아이가 말했다.
“어? 15에서 7 빼면 9가 아니라 8인데.”
저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1학년도 아는 뺄셈을 틀리다니. 어디선가 ‘저것도 모르나?’하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수학의 신, 장선우가 뺄셈에서 실수하다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다음 시간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도 긴장을 했더니 뱃속에서 난리가 났다. 그래도 첫날인데 식판에 고개를 박고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옷에 김칫국물도 흘리지 말고 깔끔하게 해치워야 한다. 또 음식은 지구 환경을 위해 다 먹어야 개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급식을 받는데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그린 키위가 후식으로 나온 것이다. 저걸 어떻게 먹나? 난 신 건 질색인데. 그린 키위가 올려진 식판을 보니 배고픈 것도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급식실 의자에 앉아 밥을 먹는데 앞자리에 앉은 애가 밥을 다 먹고는 나에게 그린 키위를 먹겠냐고 물었다.
“아니, 나, 신 거 싫어해.”
내가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했는데도 그 애는 내 식판 위에 자기 그린 키위를 떡하니 올려놓고 내뺐다. 급식실을 둘러보았다. 많은 아이가 그린 키위를 남겼다. 이쯤에서 내가 개념 있는 지구환경지킴이가 되려면 저 그린 키위를 다 먹어야 했다. 나는 밥숟가락으로 키위를 푹 펐다. 그리고 입에 집어넣으려는데 벌써 몸이 반응했다. 눈물이 찔끔 나온 것이다. 나는 눈을 꾹 감고 꿀떡 삼켰다. 눈물이 똑 떨어졌다. 급식실 앞자리에 앉은 애가 남기고 간 키위마저 먹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급식실에 남아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왜 울어?”, “키위가 겁나게 반가웠나 부지.”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졸지에 그린 키위가 반가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
5교시는 체육 시간이다. 첫날이라 가볍게 피구를 하기로 했다. 지금이야말로 나의 명예를 회복할 시간이다. 진진가 게임에서 내 꿈이 축구선수였다는 말은 진짜다. 난 운동신경이 있어 피구는 가볍게 몸풀기 정도로만 해도 경기장을 날아다닐 수 있다. 피구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진짜 내 실력을 보여주었다. 공이 날아오는 족족 잡았고, 어쩌다 잡지 못한 공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공을 잡아서 아웃이 된 생명 하나하나를 살렸다. 그제야 아이들은 나의 실력에 “오~”하고 감탄했다. 이번엔 공이 조금 높이 날아왔다. 가볍게 점프해서 공을 잡았다. 그런데 바닥에 착지하려는 순간, 발목이 꺾였다. 발목에서 뚝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아야야야야야야.”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이들이 급히 보건 선생님을 불렀다. 보건 선생님이 발목에 부목을 대 주고 걸어보라고 했다. 조금 괜찮아지긴 했지만 걷기 힘들어서 보건 선생님께서 가져다준 목발을 짚고 교실까지 왔다. 아, 운동 잘하는 멋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는데 발목을 잡고 구른 엄살쟁이가 되어버렸다.
마지막 시간이다. 발목이 아파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니 아이들은 얼른 집에 가고 싶어서 붕붕 뜨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붕붕 날아가서 좀 눕고 싶었다. 엄마도 보고 싶었다.
알림장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 똑똑 교실 앞문을 두드렸다. 교장 선생님이었다.
“장 선생, 다리는 좀 괜찮아요?”
나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네, 교장선생님, 아이들 하교 시키고 병원 다녀올게요.”
“무리하지 마세요. 발령 첫해에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면 몸 상해요.”
교장 선생님 위로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교장 선생님이 가시고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아이들 모습이 흐려졌다. 시끌시끌하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선생님을 눈물의 피구 신으로 인정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들 ‘맞아요’를 외치며 손뼉을 쳤다. 나는 이렇게 발령 첫해 ‘눈물의 피구 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