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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눈꽃 Jan 29. 2024

10년 만에 시작한 운전, 할수록 내가 된다

30대 여성에게 운전이란




 며칠 전 강릉 안목해변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3시간 30분. 매년 한두 번은 바다 보러 다녀오는 곳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어릴 때부터 운전하는 여자는 참 멋있어 보였다. 요즘에야 운전할 수 있는 여성이 많다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운전하는 여자는 흔치 않았다. 내 마음속에 그려진 운전하는 여성은 늘 당차고 멋졌다. 무슨 일이든 주도적으로 하는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도 의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을 믿는 모습이 멋진 그런 사람.


 내가 초등학생 때 고작 20대였던 이모가 한 손은 자동차 시트 어깨에 얹고 한 손으로는 빠르게 핸들을 돌리며 후진하던 모습(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흰 셔츠를 입고 걷어올린 소매 사이로 은근히 비치는 힘줄을 보면서도 설레지 않던 나인데 이모는 정말이지 멋졌다.), 고등학생 때 친구 엄마가 세단도 아닌 SUV차량으로 친구를 학교 정문에 내려주던 모습(대개 여성은 소형차를 몰았던 것 같은데 학생인 내가 보기에 엄청 큰 차를 몰고 다니니 그 또한 멋져 보였다.), 업무 차 거래처로 외근 갔을 때 함께 갔던 여자 차장님이 여유롭게 운전하는 모습까지(여자 팀장님들은 대개 다 운전을 잘했던 것 같다.). 내게 운전하는 여성은 멋짐 그 자체였다.  


 운전을 동경하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직접 차를 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운전면허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땄지만 서른이 넘어서야 운전을 시작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서둘러 운전면허를 땄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지금에라도 시작하게 됐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운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했지만, 사회 초년생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차를 사는 것도 큰 지출이지만 유지비가 더 많이 든다는 사람들의 말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한 푼이 아쉬운 내가 차를 가지는 게 맞나, 선뜻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미숙함으로 혹여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한 몫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시작을 말자 싶었다.


 그렇게 운전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는데, 아이를 낳고 마음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운전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였다. 아이와 함께 이동이라도 한 번 하려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는 아기 띠를, 뒤로는 가방을 메고, 양손에 물건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외출하고 나면 그날은 진이 빠진다. 남편이 없는 사이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내가 운전을 꼭 할 수 있어야겠다 싶었다.


 결정적으로는 마음의 부채감 때문이기도 했다. 한 생명을 키워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경제권을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게 늘 마음이 불편했다. 적은 돈이라도 내가 직접 일해서 번 돈과 남편에게 받는 돈은 달랐다. 남편은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이제 아이도 있는데 운전해야 하지 않겠냐는 남편의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왔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에 운전 연수부터 신청했다. 20시간의 연수 기간은 턱없이 짧았지만 언제까지고 선생님이 옆에서 나를 봐줄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운전은 혼자 해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 옆에 없더라도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져야 한다. 두려움을 깨고 혼자서 가까운 곳을 다녀보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운전을 한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린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강릉에 도착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와, 나 여기까지 잘 왔구나. 괜히 어깨를 으쓱해 본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빠르게 쫓아오는 차들에 겁먹기도 하고,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어두운 터널이 너무 길어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아직 미숙하지만 여기까지 왔다.


 운전하면서 이상한 벅차오름을 느꼈다. 오랜 숙명처럼 여겨졌던 운전을 드디어 시작했다는 것. 내가 내 힘으로 이 큰 차를 끌고 가고 있다는 것. 이제 나도 운전을 하면서 더 이상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도 주도적으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느낌. 나로 오롯이 존재한다는 뿌듯함. 그 모든 게 새롭다.


 여전히 나는 미숙하고, 새로운 길은 낯설다. 하지만 운전하는 내 모습이 참 좋다. 조만간 혼자 안목해변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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