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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없는 삶

나와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고들 합니다.

뽑을 사람도 없고, 뽑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들 합니다.

저라고 다를까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저도 역시 이번 선거의 분위기를 보며 동일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의 선거가 언제는 '비호감의 경쟁'이 아니었을

때가 있었나요?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선거는 비단 이번 20대 선거만의 특징도 아닙니다.


"국민이 속고 있습니다. 저 인간은 진짜 나쁜 사람입니다."

"아닙니다. 저 놈이야말로 천하에 못된 인간입니다."


지금까지 5번의 대통령 선거를 겪는 동안, 이 두 얘기를 얼마나 크게 대중에게 어필하느냐가 아닌, 다른 선거 전략이라는 것을 구경한 기억이 없습니다. 최소한 저는 말이죠.


'정책선거의 실종'이라는 말은 진부하다못해 클리셰가 되어 박제가 되어 버린 지 오랩니다. 게으른 기자의 의무감으로 작성한 뉴스에서나 볼 법한 제목이죠. 오죽하면 '네거티브 전략'을 중단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 뉴스의 소재가 될까요?


16대  노무현 48.91% Vs 이회창 46.58%

17대  이명박 48.67% Vs 정동영 26.14%

18대  박근혜 51.55% Vs 문재인 48.02%

19대  문재인 41.08% Vs 홍준표 24.03%


일방적인 게임이었다고 평가받는 17대 이명박도, 박빙이었던 18대 박근혜도 선택을 받은 비중은 어림잡아 50% 내외입니다. 투표는 결국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입니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선택했던 과반은 경쟁자였던 정동영, 문재인에 대한 과반의 반대라는 뜻입니다. 둘 중 하나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 상대에게 표를 줄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 선거의 본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거가 '비호감'의 최절정에서 치러지는 선거처럼 떠들어대는 언론의 호들갑이 오버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윤석열과 이재명에 대한 비호감의 총량이 박근혜와 문재인에 대한 비호감의 총량과 다를 리 없습니다.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싫어함의 정도가 더 증폭되고 있고,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정도일까요? 게다가 그 싫어함의 소재와 이유라는 것이 대통령의 직무수행 본질과는 거의 관계가 없어 보이는 노골적으로 자극적인 개인적인 것들 뿐이라는 것이 조금 더 저질스러워 보일 뿐입니다.


31일 양자토론, 3일 4자토론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저도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토론을 왜 보나요?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잘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니죠, 내가 싫어하는 그 후보가 멍청하게 실수하고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개하는 '혐오 없는 삶'은 제가 꼼꼼히 읽고 공부한 후 실천해 내야 할 책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바스티안 베르브너는 독일 내 최다 독자를 자랑하는 주간지《디 차이트》의 편집장입니다. 2019년에 동성애 혐오자와 동성애자와의 우정을 다룬 기사 <나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최고의 르포르타주 상인 에곤 에르빈 카쉬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에는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넘치는 네오나치, 무슬림, 좌파, 흑인이 등장합니다. 빈자와 부자, 노인과 젊은이, 남성과 여성, 이민자와 정주민, 기독교인과 동성애자 등 우리를 구분 짓는 수없이 많은 경계선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깊고 넓은 혐오의 선을 넘어 친구가 된 사람들을 만나 묻고 답하며 길을 찾습니다.   


외국인을 향한 적대감은 외국인이 없는 곳에서 가장 큽니다. 이슬람을 향한 적대감도 무슬림이 없는 곳에서 가장 큽니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 투표자에 대한 혐오 또한 그들이 거의 없는 대도시에서 가장 큽니다. 부재하는 자들이 공포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옵니다.


부재자에 대한 소식과 가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소식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미디어는 상황을 나쁘게 만드는데 책임이 있습니다. 온라인의 '에코 챔버'효과와 미디어의 '어뷰징' 기사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송고해야 할 기사가 많아지면 어쩔 수 없습니다. 취재할 시간이 부족할수록 기자들의 보도는 부정적이 됩니다.


편견은 사람들이 서로 모르는 곳에서,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있는 곳에서 자라납니다.


그래서, 저자가 찾은 길은 '접촉'입니다. 많은 사례에서 근접과 접촉이 우리의 공감을 활성화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이 공감은 우리가 이전에 멀리서 붙여 두었던 라벨을 상대방에게서 떼어 냅니다. 극우주의자, 빨갱이, 불법 이민자, 기독교인, 동성애자. 이대남, 이대녀 등. 이 모든 것이 단 하나, 사람만 남을 때까지 그 의미를 잃게 만듭니다.


제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한번 해 보기는 하려고요. 참,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혐오없는삶 #바스티안베르브너 #나와다른사람과친구가될수있을까 #역대급비호감선거 #접촉의힘 #밑줄긋는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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