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제 컴퓨터의 개인 파일 폴더에는 제가 출현한 영상이 꽤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를 위해 촬영한 것들입니다. 대개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10분에서 15분 정도 길이의 영상들입니다.
가끔 강의장의 모습 전체를 원테이크로 찍은 영상도 있습니다. 고객사에 교육 과정을 개발하여 납품한 후, 사내의 강사님들을 양성하고 나중에 그분들께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제 강의를 찍어서 제공한 강의 영상입니다. 길이가 꽤 길죠. 이틀 분량이나 하루 분량의 영상입니다.

길거나 짧거나 제가 보기엔 참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입니다. 얼마 못 보고 빨리 돌리거나 스킵해서 넘어갑니다.  

제 영상을 저만 빨리 감아서 볼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강의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도 재생 속도를 높이거나, 스킵 기능을 사용하고 계실 것이라고 99.9% 확신합니다.

2019년 8월, 넷플릭스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과 태블릿에서 재생 속도를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합니다. 0.5배에서 1.5배까지 재생 속도를 선택할 수 있죠. 유튜브에서는 0.25배에서 2.0배까지 0.25 단위로 재생 속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더 세세한 세팅입니다.

재생 속도뿐 아니라 '10초 앞으로', '10초 뒤로' 버튼도 있습니다. 스킵이 가능한 거죠. 스마트 폰에서는 탭 동작으로, 컴퓨터에서는 단축키를 사용하면 자유자재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칼럼니스트인 '이나다 도요시'가 저자입니다.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서 2~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학생 중 87.6%가 '빨리 감기' 시청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기존의 칼럼을 보완하여 이 책을 내놓게 됩니다.

'빨리 감기'가 이렇게 일반적인 시청 방식이 된 이유를 저자는 다음의 3가지로 꼽습니다.

첫 번째,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OTT를 이용하면 매월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지상파, 방송 미디어, 유튜브를 비롯한 무료 영상까지 더하면 봐야 할 작품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공급 과잉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튜브에 그렇게나 많은 '패스트무비' 영상이 넘쳐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드라마 전체 시리즈나 영화의 내용을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정리해서 설명해 주는 영상물을 '패스트 무비'라고 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작품 전체의 내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인 거죠.

두 번째, 일본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타임 퍼포먼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이 현상을 '시간의 가성비'를 추구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영화나 드라마를 빨리 감기로 보는 방식을 속독처럼 받아들입니다. 취미나 오락에서 쉽게 무언가를 얻거나 빠르게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멀리 돌아가는 것을 꺼리는 겁니다.

이 두 번째 배경이 저자의 통찰이 가장 빛나는 부분입니다.
이제는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감상'의 목적은 행위 자체이지만, '소비'에는 실리적인 목적이 수반됩니다. '화제를 따라가기 위해서'라거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작품을 보는 행위가 이에 해당합니다.

식사에 비유하자면 '감상'은 식사 자체를 즐기는 것이고, '소비'는 영양을 계획적으로 섭취하기 위해 혹은 근육을 키우기 위해 먹는 것을 말합니다. '감상'으로 이어지는 '작품'과 '소비'로 이어지는 '콘텐츠'는 구별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대사가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등장인물이 말로 상황을 설명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아졌다는 겁니다.

저자는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에서 카마도 탄지로의 대사를 예로 듭니다.

 
1화에서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하거나,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떨어진 후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말한 장면을 가져옵니다. 상황과 배경, 연기와 연출만으로 충분으로 이해가 되는 상황에서도 주인공이 굳이 대사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영상에 넘쳐나는 '자막'도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사가 없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됩니다. 어차피 주인공이 대사로 다 설명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 소도구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화면에 잡힌다면 전개상 어떤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사 없이 흘러가는 10초간의 장면에는 '10초간의 침묵'이라는 연출 의도가 있습니다. 침묵에서 비롯된 어색함, 긴장감, 생각에 잠긴 배우의 표정은 모두 만든 사람이 의도한 연출입니다.

하지만 건너뛰기나 빨리 감기로는 이런 것을 읽어낼 수 없습니다. 저자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는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 내를 돌며 작품을 빠르게 훑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도 좋은 음악을 10초 건너뛰기나 빠른 감기로 듣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걸까요, 아니면 '알고 싶어'하는 걸까요?

저는 아직은 '소비'하는 사람보다는 '감상'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영화를빨리감기로보는사람들 #이나다토요시 #가성비의시대가불러온콘텐츠트렌드의거대한변화 #재생속도 #빨리감기 #10초앞으로 #감상인가소비인가 #밑줄긋는남자


작가의 이전글 랜선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