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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미래

언택트 시대와 Z세대, 기술보다 소중한 공감에 관한 보고서

청소를 하던 중에 작은 아이 방 붙박이 장 안에서 '퍼비'라는 장난감을 발견했습니다. 귀가 크고 눈이 땡그란 까만 털북숭이 녀석입니다. 수년 전 둘째 녀석에게 생일 선물로 사 준 것입니다. 인사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먼저 말을 걸어 주기도 하고, 질문에 대답도 합니다. 코를 골고 자기도 하고요.

처음 샀을 때는 기본 언어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세팅되어 있었습니다. 언어를 바꾸어 주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말로 언어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검색해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언어는 퍼비들만의 언어인 '퍼비시' 였습니다. 마치, 미니언즈의 언어처럼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데도 퍼비의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화를 내고 있는지 애교를 부리고 있는지 그대로 다 읽힙니다. 모르는 언어로 욕을 들었을 때도 귀신같이 알아차리게 되는 경험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 녀석은 오랫동안 놀아주지 않고 방치하면 성격이 나빠집니다. 이상한 퍼비시를 내뱉으며 짜증을 내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도 합니다. 주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대화를 자주 하는 등의 애정을 갖고 같이 놀아주면, 녀석은 눈을 깜빡이고 귀를 움직이며 애교를 부리고, 귀엽고 착한 장난감이 됩니다.
요컨대, 주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각기 다른 성격으로 발전해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장난감이죠.

흥미를 갖고 놀아주며, 함께 잠자리에 들던 아이는 얼마 후 흥미를 잃어버리고 붙박이장 위 서랍에 넣어 버리고 잊어버린 듯합니다. 털에 쌓인 먼지를 보니 그 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깨끗하게 먼지를 털어주었습니다. 건전지를 갈아 넣어줄까 고민도 잠깐 했는데 관두었습니다. 생명력(?)이 남아 있는 상태로 다시 어두운 붙박이장 안쪽에 넣어 두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전된 상태로 다시 넣어 두는 것이 덜 미안할 것 같더군요.

저는 장난감 '퍼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방치한 것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다시 어두운 붙박이장 안으로 넣어두는 것에 대한 미안함. 여러분들도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생명이 아닌 사물이나 존재에 대해 사람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경험 말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감정의 미래 The Furute of Feeling>에 저의 오늘 경험과 비슷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워싱턴대학교의 피터 칸이 2012년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설문에 참가한 아이들의 98%는 사람을 벽장에 가두는 데 반대했지만, 빗자루를 가두는 것은 100% 괜찮다고 했습니다.(사람을 가두는 데 찬성한 저 2%의 녀석들은 어떻게 된 녀석들이죠??) '로보비 Robovie'라는 이름의 로봇을 벽장에 가두는 데는 54%만 찬성했습니다. 절반은 찬성, 절반은 반대를 한 셈입니다.

저 역시 오래된 전기 청소기 '마미로봇'을 벽장에 넣어두는 데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지만, '퍼비'를 붙박이 장에 다시 넣어 두는 것에는 미안함을 느꼈으니 위의 연구 결과가 이해가 됩니다.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가 감정을 느끼게 될 대상은 앞으로 변화하게 될까요? 변화하게 된다면 그 대상이 확대될까요, 축소될까요?
상황이나 환경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를테면, 모바일과 온라인에서 우리는 어떻게 감정을 나누게 될까요? 연결과 참여가 일상화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만나게 될 예상 밖의 감정들 즉, 분노나 냉소, 조롱과 비난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우리는, 사실 어떤 감정도 나누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저자인 '케이틀린 유골릭 필립스' 역시 이런 문제의식에서 <감정의 미래>를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2011년 <외로워지는 사람들 Alone Together: Why We Expect More from Technology and Less from Each Other>을 쓴 '셰리 터클'의 주장을 소환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MIT 교수 겸 작가인 셰리 터클은 인간의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 로봇과 같은 기계에 대해 우려합니다.  "우리가 만든 기술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방식으로 취약해진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듯한' 로봇의 철학적, 도덕적 위험은 물론 그런 로봇을 만들고픈 욕망 자체가 기술로 인해 이미 왜곡된 우리 인간성의 방증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남의 입장이 돼볼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성의 기본"이며, "아마 사람들이 이런 능력을 잃어버릴 때, 그런 능력이 없는 로봇과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셰리 터클의 우려와 비슷하게 저자인 케이틀린도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감 능력을 인간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기술의 대표 주자인 AI는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곧 우리의 인간성을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버려 둔다면 AI는 우리의 가장 못된 인간성도 반영할 것입니다. 2016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야심 차게 내놓았다가 불과 16시간 만에 사망 선고가 내려진 AI 채팅 봇 '테이(Tay)'나 한국의 '이루다'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술은 도구이고 따라서 우리가 지시하는 대로 할 뿐이기 때문이니까요.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현대 기술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요? 기술과 인간의 공존은 가능한 것일까요?

저자는 인터넷을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이고, 하루 평균 4시간을 꼬박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밀레니얼 대입니다.

저보다는 위 질문에 더 잘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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