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태어난 게 범죄

트레버 노아의 블랙 코미디 인생

작년 오스카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한국어 소감'이 인구에 회자되며, 통역자인 '샤론 최(최성재)'가 매스컴에 주목을 받는 기현상이 벌어졌었죠.

올해 오스카에서는 윤여정 님의 '영어 소감'이 주목을 받습니다. 우아하고 솔직하며, 위트가 넘친다는 평가가 주를 이룹니다. 맞습니다. 소감이 아니더라도 우리 눈에 비친 윤여정 님은 사랑받을 만하고, 멋진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축하를 받을 만한 자리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자리가 부여한 '후광 효과'를 덧입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분이 무슨 언어로 소상 소감을 얘기했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일본어로만 하지 않는다면) 두 분은 한국인인 저에게 충분히 자랑스러운 존재들일 텐데 말입니다.

이번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두고 경합을 펼쳤던 '글렌 클로즈'가 출연한 영화는 '힐빌리의 노래'입니다. 약물에 망가져가는 딸의 모습에 위태로움을 느끼고, 주인공인 외손자 J.D.밴스를 집으로 데려와 길러내는 강인한 할머니 역을 멋지게 소화해 냈습니다.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그녀 역시 멋진 배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6년에 발간된 <힐빌리의 노래 Hillbilly Elegy>는 미국의 대표적인 러스트 벨트인 오하이오의 철강도시에 자란 'J.D.밴스 J.D. Vance'의 자전적 실화를 그려냅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강력하게 지지한 소외된 백인 노동계급 - 레드넥, 화이트 트래시 혹은 힐빌리라고 불리는 - 의 삶을 가장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에서도 꽤 많이 읽혔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태극기를 들고 모여든 당시 한국의 광장에 계셨던 어르신들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애쓰는데 도움이 된 책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문화와 교육에서 소외되며, 가족과 공동체가 무너진 삶이 어떤 분노와 절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가난과 불평등은 통계가 아니라 현실과 삶이라는 점을 고발합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희망을 뺏고 그다음 목표를 뺏은 후,  결국 인간성마저 빼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트럼프 때문에 읽게 된 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년 후인 2018년 <하틀랜드 HEARTLAND>라는 책을 '세라 스마시 Sarah Smarsh'가 써 냅니다. 부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힐빌리의 노래>가 가난한 백인 '남성 노동자'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에 반해, <하틀랜드>는 '가난'한 사람으로, '여성'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 본 적 없는 지역 출신'으로 태어난 삶이 어떤지 얘기합니다. 필생의 목표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합니다.

"그래? 진짜 힘든 '여성'의 삶이 뭔지 얘기해 줄까? 잘 들어!"라고 고함을 지르는 듯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저는 <태어난 게 범죄 BORN A CRIME>를 읽었습니다. 저자인 '트레버 노아 Trevor Noah'가 누구인지는 잘 몰랐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내용에 <힐빌리의 노래>가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의 추천이라는 것은 책을 집어 들고서야 알았지만 말입니다.  

모든 자녀는 '사랑의 증거'이지만, 트레버 노아는 '범죄의 증거'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존재하던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독일계 스위스인이었고, 어머니는 남아공의 원주민은 코사족이었기 때문입니다.

1927년 제정된 남아공의 '배덕법'은 유럽인과 원주민 간의 불법적 성관계 및 그에 부수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아파르트헤이트가 공식적으로 폐기될 때까지 이 법은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트레버 노아는 태어날 때부터 숨겨져야 했고,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와 산책할 때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인 '로버트'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엄마랑 산책을 할 때는 엄마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을 고용하여 그녀와 함께 산책을 하며, 엄마는 멀찍이 뒤에서 자신이 고용한 사람과 아들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아들 모세의 유모가 되었던 '요게벳'이 떠올랐습니다.

백인인 아빠보다는 피부가 검었고, 흑인인 엄마보다는 피부가 하얬기 때문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트레버는 엄마 아빠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설명을 요구하는 경찰이 두려웠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백인 우월 정책을 펼쳤던 그 시기에 남아공에는 흑인과 백인의 갈등만 부각되지만, 실은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트레버와 같은 '혼혈인'들이 있었습니다. 백인 공동체에도, 흑인 공동체에도 소속될 수 없는 경계인이자 외부인들 말입니다. 물론, 저자인 트레버 노아는 스스로를 '흑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힐빌리의 노래>는 백인 남성을, <하틀랜드>는 가난한 여성의 삶을 얘기하는데 반해 <태어난 게 범죄>는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의 증거였던, 흑인이라고 생각했던 혼혈인의 삶이 담겨있습니다. 게다가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폭력적인 나라가 배경입니다. 이야기는 온통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펼쳐 읽는 순간 그런 상이 무너집니다. 앞선 두 이야기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슬픈 이야기여야 마땅할 텐데, 이상하게 재미있습니다. 웃기기까지 합니다. 책의 뒷날개에 쓰인 소설가 김중혁의 추천처럼 트레버 노아가 스탠드업 코미디언, 그것도 비속어나 성적으로 자극적인 표현을 삼가면서도 관중을 압도하는 탁월한 언변의 코미디언이라 그런 걸까요?

슬프고 힘들었던 자신의 삶을 저렇게나 긍정적이고 유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반추한다는 것은, 저자가 얼마나 단단하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인가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런 태도를 엄마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트레버 노아의 엄마는 아들을 가르치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정확하게는 엄마이기 이전에 부당한 사회적 압박과 관성에 저항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합니다만.)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해. 고통이 너를 단련하게 만들되, 마음속에 담아 두지 마. 비통해하지 마라."
차별당하고 소외당하며, 얻어맞고 도망 다니는 삶을 살면서도 비통해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엄마라니 멋집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고통과 무게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삶이 버거운 이유는 상처를 응시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와 여러분에게 꽤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J.D.밴스에게는 '할머니'가 있었고, 세라 스마시와 트레버 노아에게는 '엄마'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에게도 '어머니'가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태어난게범죄 #BornaCrime #트레버노아 #TrevorNoah #힐빌리의노래 #JD밴스 #하틀랜드 #세라스마시 #밑줄긋는남자 #ThisisBook

작가의 이전글 동화의 정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