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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uka Nov 04. 2022

내게 중요했던 것은

반 고흐의 자화상과 Merry Christmas Mr.Lawrence

몇 년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곧잘 피아노 연습실로 달려갔다. 어렸을 때 6 년 정도 배우고 나서 다시 치기까지 20 년 가량을 쉬었으니, 워낙 손이 굳어 간단한 곡 하나 근사하게 치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잡념을 날릴 수 있고, 기분도 좋으니까 꽤 몰두하게 된다.   


클래식부터 뉴에이지, 게임 OST 등 다양한 장르에서 유명하고 선율이 좋은 곡들은 직접 쳐 보고 싶은 바람이 있어 악보를 수집해 두는데, 내가 연주하기에는 난이도가 있는 곡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치기 쉽게 편곡된 악보가 아니라 원곡 악보였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일본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작품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에 삽입된 곡인데 선율이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어느 정도 틀리지 않고 연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악보를 찾아보았는데, 이게 웬걸. 플랫(♭) 5 개가 붙은 곡이다.

초견(sight-reading , 初見  : 악보를 보고 처음부터 바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느린데다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는 손가락 탓에 영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곡을 어떻게 해서든 ‘원본 그대로’ 치고 싶었다. 음표 하나도 빠지지 않고 조 옮김(곡 전체를 각 음의 상대적인 음정관계를 유지한 채 그대로 다른 높이로 옮기는 것 을 말한다)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열심히 연습하였지만 더디게 나가던 진도에 흥미를 잃었고, 결국 연습을 중단하고 말았다.  



반 고흐의 자화상

생애 첫 전시회 관람이었던 반 고흐 전(展)이 떠올랐다. 2007 년 무렵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었는데,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나게 그림을 구경하러 갔었다. 전시회 안쪽에서 벽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그림을 보며, 제일 먼저 눈에 익은 작품을 찾아냈다. 압생트(absinthe :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의 예술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에메 랄드 빛 술. 많은 사람들의 작품에 등장하였던 만큼 사랑받았는데,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탓에 반 고흐나 로트렉 등의 화가가 중독으로 발작하거나 사망했다. )가 있는 식탁, 해바라기가 꽂힌 병, 밤의 테라스, 그리고 나의 눈길은 고흐의 자화상 앞에서 멈추어 섰다. 떨리는 마음으로 팸플릿과 설명을 듣고 있는데, 관계자분 말로는 도난 위험이 있어 원본은 물 건너오지 못하였고, 저 작품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토대로 Copy 한 그림이라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가슴 한 켠에 실망이 밀려오며 시무룩 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왜 실망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고흐의 작품을 보러 간 것이었을 텐데, 내가 본 것은 고흐의 작품이 아닌 걸까? 곰곰이 생각해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고흐가 직접 그린 것 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꼭 손으로 직접 그려야 고흐의 작품일까? 진품인지 위조품인지에 따라 나뉘는 예술품 감정이 아닌데, 눈앞에 있는 작품을 형식이나 틀에 매여서 값을 매기듯 가치를 매겼던 것은 아닐까. 원본(original)이라는 것에 대해 ‘진짜이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공식으로 엮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아닐까. 정해진 형식도, 오점 하나도, 변형되지 않고 태어나기만 한 최초의 그것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피아노 앞에서 악보집을 꺼냈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플랫이 5 개 붙은 것 대신 조 옮김으로 편곡된 샵(#) 두 개짜리 악보였다. 스윽 훑어보니 이 정도라면 완곡도 가능할 것 같았다. 4 마디를 연주해 보았다.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같은 레파토리의 곡이다. 맑게 울려 퍼지는 선율이 즐겁다.   


연주곡이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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