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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Dec 30. 2021

자식복 없는 여자,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

은래빛 에세이


나는 어릴 적부터 사주팔자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먼저 엄마가 내게 말해주셨고,

어릴 적 약을 지으러 갔던 한약방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당시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때 몸이 약해 한약을 지으러 갔는데, 할아버지는 내 맥을 짚으시고는 엄마에게 나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그는 낡은 책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나를 한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아이가 아주 똑똑하네요, 건강할 거고요, 지금 아픈 것도 금방 나을 겁니다"


라고 말하고는 나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셨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거라"




나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날씬하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호감으로 대했고, 학교에서도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똑똑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의 노력에 비해서 성적도 곧잘 나왔고, 취미로 배웠던 피아노로도 두각을 나타내어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께서는 절대 피아노를 그만두지 말라며 나에게 음대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었다.



그렇게 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무난하게 대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사주카페라는 것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카페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사주를 보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너도나도 삼삼오오 사주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곤 했는데, 나도 친한 친구와  가장 유명하다는 사주카페를 찾아갔다.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는 내 사주를 짚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사주네요... 원하는 바가 대부분 이루어질 겁니다..


또 앞으로 만나게 될 배우자도 좋은 사람이군요.. 경제적으로 안정적일 거예요..


그리고 아가씨는 몸과 마음가짐이 정숙한 훌륭한 여성이네요.. "



그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딱 하나 있는데..  자식복이 약하다는 겁니다..


자식이 아주 귀할 거예요.. 아가씨 이름을 작명할 때 그 부분이 보완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의 나는 스무 살이었다.


결혼도 아직 상상할 수 없었던 나이에 자식복이 없다는 말은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기 어려운가?


"그리고 하나 더.. 남편이 아주 자상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능력도 있고요...

흠흠.. 근데 얼굴에.. 큰 흉터가 있을 거예요, 얼굴 절반 정도를 가리는 곰보자국 같은.."


"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얼굴 절반을 가리는 곰보자국이 있는 남자라니!


그런 남자와 내가 결혼해서 산다고??



난 적지 않은 불쾌감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그 말이 계속 생각났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한 후 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대학교 때부터 알던 선배였는데, 키가 크고 자상하고 외모도 준수한 남자였다.


난 그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얼굴 피부가 나보다 하얗고 고왔는데, 얼굴에 흉터는커녕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난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문득 대학생 때 만났던 그 사주카페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뭐야, 제일 잘 보는 곳이라더니 엉터리였잖아?




그렇게 결혼 3개월 만에 우리에게 찾아온 해준이는 3살이 되기 전에 자폐성 장애 1급으로 판정받았다.


그는 아무런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하루 종일 물건을 빙글빙글 돌리거나, 손가락을 눈앞에서 흔들며 "휘유휘유~ 뚜뚜~"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또한 자주 공격적으로 할퀴거나 고함을 지르고, 한밤 중에 깔깔 웃으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나는 그런 해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식복이 없다', '자식이 귀하다'라는 것이 이런 의미였구나..


단순히 임신이 힘들다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내 팔자도, "약한 자식복" 하나에 순식간에 수렁으로 떨어졌다.


평생을 먹이고 입히고 사랑하고 거두어야 하는 자식이 이 모양인데,


누가 나를 보고 좋은 팔자라고 말할까?


초등학생이 아닌, 스무 살이 아닌 지금의 나도 과연 "좋은 팔자" 일까?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 아저씨의 말이 모두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의 얼굴은 희고 흉터가 없었지만,


어릴 때 바닷가에서 친구가 휘두른 조개껍질에 눈을 크게 다쳐 한쪽 눈의 시력이 거의 없었다.


그와 가까이 마주 보면,


왼쪽 눈동자를 크게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있었다.




그래, 그런 거구나.


난 왜 그 흉터를 곰보자국과 같이 얼굴 피부 위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하고 내 삶을  일구어 왔다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면 정해진 사주팔자 대로, 나의 운명대로 살아온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얼만큼 노력하고, 어떻게 선택했든 간에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큰 틀 말이다.



결국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반면,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당연한 듯 가질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쯤 되면 무언가 허탈해지고 허무해지는 기분이 들지만, 뭐 어쩌겠는가.


큰 운명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밖에.


그리고 내가 이루거나 가진 것에 대해서 자만하지도,

못 가진 것에 대해 너무 회환스러워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난 자식이 평생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르는데, 해준이를 얻었을 것이다.

아니면 건강한 자식을 낳았더라도 자식을 잃고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 옆에 따뜻하게 껴안을 수 있는 해준이가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어쩌면 난 정말 보기 힘든 큰 추상을 가진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지만,

운명은 그 흉터를 눈동자 안으로 숨겨주었다.


비록 시력은 좋지않지만

남들이 볼수 없는 흉터임에 감사한다.




<자식복 없는 여자,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 끝>



이미지출처 : https://m.blog.naver.com/designpress2016/22139001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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