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신 Nov 30. 2023

새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1월 1일. 곧 모든 숫자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날이 온다. 삶이란 연속된 것이지만, 1월 1일이라는 숫자는 마치 삶이 단속된, 여러 챕터의 연결인 것처럼 보이게 해 준다. 새로운 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 실제론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의 한 지점일 뿐임에도 '새'해에는 '새'마음가짐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은 일 년의 선물과도 같은 이 연말이라는 시간에 다가오는 새해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다릴지 적어보고자 한다.







1. 지난날, 내 새해 목표들


우선 2024년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을 적기에 앞서, 지난 시간 동안 내가 새해에 했던 다짐을 돌아볼 것이다. 으레 운동, 독서, 공부 등 '새'사람이 되기에 도움이 되어 보이는 목표들을 마음속에 그리곤 했으나, 매번 새해에 어떤 다짐을 하며 글을 남기진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구체화된 목표의 사진은 2017년, 그리고 2018년의 기록이 전부.


먼저 2017년의 목표를 살펴보자. 대학교 2학년이었던 이때의 나는, 새해 목표가 아니라 개강 목표를 세웠다.


-1학기

1. 학점 올리기

2. 소식하기 (소식의 대명사)

3. 술자리 약속 신중하게 잡기

4. 과제 반드시 하기

5. 출석 100%


-2학기

1. 학점 올리기

2. 다이어트 (소식습관)

3. 술자리 약속 신중 + 안주 잘 안 먹기

4. 과제 꼭, 출석 100%

5. 자격증 1개 이상 따기

6. 행복하기


'목표'라기에 걸맞은, 수치적이고 명확한 항목들이다. 2학기에 들어 '행복하기'라는 다소 감성적인 목표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을 제외하면, 21살의 나는 학점, 다이어트, 절주라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대학교 2학년은 내가 제일 체중이 적게 나갔던 해였고, 신입생 때 0.0이라는 충격적인 학점을 (올 F) 만회한 해이기도 하다. 이때의 나는 목표지향적이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어렸다. 노력한 것에는 성과가 따라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부지런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여전히 이 중에서 절주 같은 목표들은 성취하지 못했지만.


2018년도에는, 목표라기보다 새해를 맞이하는 다짐을 했다.



2018

결심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년에는

1.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2. 자의식 과잉으로부터 해방되기

3. 타인이 될 수 없음을 깨닫기

4. 타인처럼 될 필요가 없음을 깨닫기


1년 사이에 목표의 결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실제로 어떤 것을 얻었고 잃었는지, 보이는 바와 관계없이 나는 늘 남들과 날 비교했다. 남들의 눈에 비치는 내가 구리진 않을까 염려되었고, 늘 어떤 대상을 상정하고 그가 나였다면, 하는 공상을 잦게 했다. 그럴 때면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내 상황이라든가, 능력에 대해 비관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실제로 이 글을 쓴 해 12월 나는 수면부족과 우울증 증세로 병원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약을 먹었다.


2023년에는 삶의 목표를 정하지 않았다. 2022년도에 내 삶이 무척이나 황폐해졌기 때문에, 하루하루 내 인생을 살아내는 것 말고는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4월, 모종의 계기로 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만든 목표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던 '한 권의 책은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2022년 나는 내 블로그에 '나는 넘칠 것 같이 다양한 감정과 욕구가 있었는데 이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껍데기 같은 인간이 된 것 같다.'라고 썼다. 슬픔도 기쁨도 큰 진폭으로 느끼던 나였는데, 그래서 내 남은 조각이라도 그러모아 삶을 운용해보고자 하였는데, 모든 게 스러져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기분이었다. 2023년이 끝나간 지금, 다행히 이 목표 하나는 뚜렷하게 이룬 것 같아 기쁘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인간성에 감동하면서 나는 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고, 다시 아리고 예민한 심장을 가진 나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20살 이후,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가, 그 목표 속에서 질식하고 절망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였다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빈 껍데기 같은 사람이 되었다가, 지나가는 바람에도 눈물이 나는 아리고 예민한 심장을 가진 나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물론 이 내면의 굴곡과 역경은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새해에 어떤 직장에 가고, 어떤 집을 사고, 어떤 직급을 달 것인지에 대한 목표를 세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건 숨이 붙어 있는 내내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싸워온 내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삶의 연속이자 또 다른 챕터의 시작에서 내가 다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것일까.





2. '할 수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찾기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에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한병철은 현대의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조동사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데, 이는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에 빠트리게 한다고 설명한다.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성과주체인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며, 실패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만 묻게 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이라는 조동사는 '할 수 있음'의 성과사회 너머에서 성립하는 에로스의 핵심 조동사이다. 비록 이 책에서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에로스와 연결되어 설명되지만, 나는 최근 2년 동안 이 조동사가 비단 사랑뿐 아니라 내 인생에 얼마나 자유를 줄 수 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2021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억지로 상경했고, 결국에 학위를 얻지 못한 채 1년을 허비하게 되었다. 연구실에 적응하지 못했던 시간들, 부담감과 압박감, 그 속에서 무작정 할 일을 놓아버리고 주저앉은 나, 스스로가 생경할 정도로 보지 못했던 내 모습을 많이 봤고, 그 속에서 나는 닳고 닳아서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 나는 내가 더 잘할 걸, 내가 더 노력할 걸, 이런 말을 자주 했는데, 그때 나의 연인은 그것을 자기기만이라고 불렀다. 애초에 대학원을 진학할 정도로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공부가 싫을 리가 있겠느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이 일이 내가 '할 수 있을 수 없는' 영역의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진학 후 1년, 휴학 1년, 지금 나는 20대 후반이 되었지만 내 삶에는 그 어떤 연속성 있고 전문성 있는 일련 된 경험도 없다. 다만, 여러 시도의 자국들이 남았을 뿐이다.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찾아 그 길을 떠나는 사람도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심연으로부터의 시도를 통해 내가 '할 수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찾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의 자국들은 결코 낭비라는 이름으로 격하되지 않을 것이다.





3. 나의 무기 만들기




요즘 같은 세상에서 내가 아직도 시인이라는 사실이 후회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어서

그래서 남몰래 공포에 시달릴 적마다

만약 내가 시를 쓸 수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뿐이다.


세상에서는 이토록 천대받고 무용한 것이 내게는

차마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 목숨을 지켜 줄 정도로는 귀하다.


그러니


어차피 그런 것이 세상이라고,

어쩔 수 없는 이 세상의 어려운 이치라고 믿으면서,

내게 남은 나머지 인생을 마저 살아 내고자 한다.


시는 나의 무기다.


이응준의 '목화, 어두운 마음의 깊이'에 나오는 작가의 말이다. 세상에서는 천대받고 무용하지만, 적어도 내 목숨을 지켜 줄 정도로는 귀한 나의 무기. 


나의 경우에는 시였다. 사는 게 너무너무 무서워서 어깻죽지를 붙잡고 울었던 지난날 밤, 심보선의 '청춘'이라는 시가 없었다면, 나는 관성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유난떠는 내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각자의 삶은 투쟁이다. 삶 너머에서, 혹은 기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싸움들. 가끔은 스스로가 날 공격하기도 하는 그 외로운 전투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줄 무기를 찾는 일. 이건 다만 나의 목표가 아니라, 이 글을 보는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2024년 한 해는, 꼭 삶의 무기를 찾기를, 혹은 이미 찾았다면 잘 벼리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미워하기에 마땅한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