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서여사 Jun 19. 2021

남편은 왜 혼자 미국으로 갔을까?


 어느 날 남편이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는 “아무래도 내가 수정이를 돌봐야겠어!” 하며 15년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유를 알고 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혼자 미국 유학 중인 딸아이가 아빠에게 매일 울면서 미국에서 다 같이 살자고 전화하니, 딸의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는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이민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어릴 때부터 딸은 철저하게 아빠의 껌딱지였다. 낯가림이 심한 딸은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엄마보다 아빠와 시간을 훨씬 많이 보낸 아이였다.

2005년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한참 조기유학 열풍이 불었다.


“엄마! 나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

“너 혼자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우리 반에 수지도 미국으로 갔고, 민정이도 호주로 곧 간대.”

“혼자는 안돼.”

“왜 안돼?”

    

 왜 안되는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 당시 아이는 전교 부회장을 하고 있었으며 똑소리 나게 스스로 공부하고 행동하는 아이였다. 미국에 사는 여동생과 통화 후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아이가 원했기에 6학년이 되던 해 이모가 사는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보내게 되었고, 이모부가 딸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아이가 출국하던 날, 인천 국제공항에서 절차를 마치고 밥을 먹인 다음 게이트로 들어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이도 혼자 떠난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는지 안의 유리창 틈으로 얼굴을 내밀며 울먹거렸다. 이 모습에 남편이 눈물을 보였고, 내가 울기 시작하니 4학년이었던 아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미 들어간 상태였고 남은 우리 세 명은 그 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전날까지도 실감 나지 않았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방을 보며 또 울었다.      

 

갑자기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왜 어린것을 혼자 보냈을까? 남들이 보낸다고 하니 ‘나도 자식 유학 정도는 보낼 수 있는 엄마야!’ 하고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년 반이 지나자 아이는 미국에서 가족들과 다 같이 살고 싶다고 매일 전화를 해왔다. 회사생활이 다 그렇듯이 그 당시 남편 역시 힘들게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사표를 내고 싶었을 것이다. 회사 스트레스와 딸에 대한 걱정으로 술, 담배를 하지 않던 남편은 술을 먹기 시작했고, 살도 빠지고 탈모도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회사에 사표를 냈다며 아이가 있는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미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아들은 초등학교 야구선수를 하고 있었기에 함께 갈 수가 없었다. 딸에게 조금만 기다리라고 아빠가 곧 들어간다고 하니 언제부터인가 딸아이의 울먹이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남편은 스시 기술을 배우며 힘겹게 미국에서 취업할 준비를 했다. 대략 6개월 넘게 걸린 것 같다.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딸이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잠시 들어왔다. 남편은 딸아이와 둘이 미국에 가서 우선 1년만 살아보기로 했다. 아빠와 같이 미국으로 가던 날 딸의 표정은 세상을 다 얻은 얼굴이었다.


또다시 인천 국제공항에 가서 가족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번엔 둘씩 나누어 한국과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 기러기 아빠가 아닌 기러기 엄마였다. 미국 생활이 녹록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남편의 하소연을 들어야 했다. 매일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어야 했고, 영어 공부를 해야 했으며, 초밥을 만들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뿐인가? 집안 살림에 아이 도시락까지 챙겨줘야 했던 남편은 12시간 시차를 넘어 전화로 힘듦을 이야기했고, 나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또 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