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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서여사 Jun 23. 2021

딸아! 나답게 나다움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7년을 보아온 그 녀석이 이제 우리 집 사위가 되겠단다. 앞으로의 계획을 우리에게 브리핑해 주는데 든든해졌다. 저 녀석을 믿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7년을 보아온 우리 부부는 우리 집을 밥 먹듯 드나들며 늘 웃는 낯으로 한결같던 모습에 허락해 주었다. 7년을 우리 집에 드나들었으니 아들과도 절친이다. 아들의 형처럼 동생도 잘 보듬어 주니 다행이다.


잠시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벌써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만감이 교차하나 보다. 언젠가는 보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다. 그럴 만도 하다.


아빠의 얼굴을 잡으며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붓고 매일 아빠에게 “나는 이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이렇게 말하던 딸이었고 아빠가 재워줘야만 잠드는 어린 딸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와 둘이 등산도 가고, 밥도 먹으러 다녔던, 당신 눈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딸이 이젠 가정을 이루겠다는데 어찌 서운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아이들을 독립시킬 때도 너무나 서운해했던 남편이다.


남편과 오랜만에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꺼내 보았다. 딸아이의 사진은 7살 전까지는 온통 아빠에게 안겨있는 사진들이다. 아빠의 무릎, 팔,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유독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남편은 사진을 보며 또 한 번 눈시울을 붉혔다. 하긴 이런 딸 사랑에 미국에서 딸아이가 힘들어하자 회사도 그만두고 딸아이에게 달려갔던 남편이었다.


딸이 귀한 우리 집에 첫딸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벌써 커서 새 가정을 꾸린다니 감회가 새로워 29년 전의 나의 결혼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엄마 없이 결혼과 출산을 했던 나를 되돌아보니 나름 잘 살았구나 싶었다.


지인들의 연락이 오기까지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엄마 없이 결혼해야 했던 나와 지금의 딸이 오버랩 되며 29년 전의 나로 돌아갔다. 내 나이 24세, 엄마 나이 49세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엄마 없이 결혼하고, 엄마 없이 아이를 낳고, 엄마 없이 아이를 키워야 했다. 내가 살면서 가장 불안했던 시기는 내 나이 49세에 내 딸의 나이가 24세였던 시기다. 그해에 나는 가장 불안한 한 해를 보냈고 그해가 지나 50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안도했다.


24세 때 엄마를 잃은 나는 살림을 배우지 못했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데 나는 학창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직장을 다닐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살림에 대해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라는 존재가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만 알았다. 잠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되다 보니 어떤 날은 슬프게도 엄마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50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으니,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가야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원통했을까? 하늘나라 가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하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커피를 한잔 내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엄마의 사진첩을 꺼냈다. 낡고 오래된 사진 앨범에 들어 있는 엄마의 젊은 사진 속 얼굴, 엄마는 환하게 웃고 계셨다.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나보다 더 젊고 고운 얼굴, 그 사진 속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묻어 있었다. 두 딸과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웃고 있는 사진 속엔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무슨 이야기이길래 저렇게 깔깔거리며 모녀가 웃고 있을까? 그 시절이 참 궁금하다.


잠시만이라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답답함에 무작정 밖으로 나가 걸었다. 걷다 보니 엄마와의 추억여행이 잠시 중단되었다. “엄마!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 엄마 얼굴이 기억이 안 나네. 나는 여기서 우리 아이들과 더 오래 지내다 엄마한테 갈게.”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그리운 마음을 접으며 씩씩하게 해가 지도록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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