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즐겨보는 예능프로가 있다.
얼마 전 남편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던데" 라며 흥미로운 듯 말을 꺼냈다.
인순이, 박미경, 신효범, 이은미 가수가 나오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응? 나가수 다시 하는 거야?"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남편은 박진영이 4명의 가수들과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내용이라며 유튜브를 보여줬다.
국내 최정상 보컬리스트 4인이 K팝 최정상 프로듀서 박진영의 프로듀싱과 함께 그룹으로 컴백하는 여정을 그리는 프로그램
(골든걸스 공식홈페이지)
최정상의 디바 4인이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옛적 <나는 가수다>가 처음 나왔을 때의 신선한 충격 못지않았다. 그런데 '걸스' 라니? 걸그룹을 표방하겠다고?
'그래, 프로듀서가 박진영이네. 평범한 걸 할 리가 없잖아.'
그녀들의 환상적인 목소리로 귀호강이나 시켜줄 것이지, 라며 너무 튀려고 하는 것 같은 박진영의 행보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랬던 나의 마음을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빼앗았을까.
1. 사업가 박진영의 설득의 기술
초반 내용은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들고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우선 단체로 만나지 않고 각각 한 명씩 만났다. 왜 그랬을까? 1:4는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공이 엄청난 가수들을 뭉쳐놓으면 그 기가 엄청나서 씨도 안 먹힐 거라는 판단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방송이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효범의 감성과 음악에 대한 진한 사랑, 박미경의 댄스가수에 대한 열망, 인순이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욕망, 이은미의 술에 대한 사랑(?)과 의외로 약한 마음. 박진영은 이렇게 맞춤으로 공략을 시작했다.
또한 박진영의 머릿속에 거절에 대한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무조건 된다는 생각으로 모든 구상과 계획이 그에게는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누나들에게 쩔쩔매는 박진영처럼 그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박진영이 계획한 이상 4명의 쎈 누나들은 이미 박진영 손바닥 위에 있었다.
2. 가수 신효범의 재발견
나에게 신효범이란 가수는 '난 널 사랑해'의 노래 잘하는 발라드 가수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 이제 이 언니를 사랑하게 된 걸까. (신효범이 부릅니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각자가 요즘(젊은이들) 음악으로 춤과 노래를 테스트받는 자리였는데, 신효범은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을 공연했다. 이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르겠다. 이 곡의 가사가 이렇게 잘 전달되다니.(개인적으로 원곡가수와 비교가 안 되는 전달력이라고 느꼈다.) 댄스곡이 이렇게 마음을 울리다니. 그때부터 나의 신효범 덕질은 시작되었다. 알고리즘이 제공한 영상들은 나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본업인 발라드는 말해 뭐 하겠는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 언니의 인생이 궁금해진다.
'언니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거예요?'
이거면 끝 아닌가. 그 사람이 궁금해지고,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3. 이은미가 핑크를?!!!
초반부터 이 프로젝트에 가장 비협조적인 문제의 인물은 이은미였다. 이은미니까 당연히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이은미가 누구인가. 맨발의 디바, 독보적인 가창력,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 등.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이은미는 이랬다.
가장 먼저 의외라고 생각한 지점은 이은미가 신효범, 박미경과 20년 넘는 절친이라는 것. 이은미는 친구도 안 사귈 것 같았다. 도도하고 고독한 이미지였던 이은미가 친구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한다. 골든걸스의 귀여운 막내 이은미라니. 싫어, 못해를 달고 다니면서도 결국 다 하는 마음 약한 이은미. 내가 이은미를 몰랐네.
박미경과의 듀엣무대에서는 결국 핑크의상을 입은 이은미는 이제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춤의 매력을 알아가게 되는 모습에는 응원을 보냈다.
덧붙여 '이은미는 역시 멋지구나' 했던 장면이 있었다. 춤 연습 때는 투덜대다가도, 음악에 있어서는 프로듀서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프로다운 모습은 '역시 이은미'였다.
4. 드디어 데뷔무대 <One Last Time>
인순이, 신효범, 박미경, 이은미. 네 명의 디바들이 무대를 찢어놓으셨다. 동시에 화음 넣는 부분은 압권이었다. 그녀들의 무대야 더 말하면 입만 아프지만, 귀호강에 눈호강까지 한 퍼포먼스였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곡의 가사였다.
One Last Time
생각이 안 나 언제 마지막으로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나
조금씩 무뎌지는 가슴 이젠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아
살아있는데 죽어있는 것 같아 나
멈춰있는데 갈 곳이 기억이 안 나
답을 찾는데 질문이 뭐였었는지
내가 날 잃어버렸나
너무 늦어버렸나
아니면 날 막는 게 바로 나인가
이제 나에게 기회를 줘
Don't wait any more
(중략)
안 해 본 도전은 다 실패야
망설인 기회는 다 낭비야
그러니 어서 wake up
이젠 내 안에 들리는 소릴 외면하지 마
다신 안 올지 몰라 이 기횔 마지막이라 생각해 미련이 남게 하지 마
떨어진대도 날아가 볼래 그래야 내가 숨 쉴 수 있으니
그녀들은 더 이상 도전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다. 그동안 이루어놓은 것만으로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후배들의 존경을 받기에 차고 넘쳤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의 도전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결국엔 그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어떤 위치에 있든 자신의 틀에 갇혀있기를 거부하고,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게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수학강사이고 아내이자 엄마이다. 그래서 일 잘하고, 가정 잘 꾸리고, 애 잘 키우면 된다(사실 그것도 쉽지 않지만). 그저 주어진 내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적 역할이 주어지기 전부터 나는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나를 돌보고, 나와 소통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나는 지금 도전의 위치에 서 있다. 직업이 작가도 아니고, 내 글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다. 내가 글을 잘 써야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 없다. 하지만 내 안의 나는 글을 쓰고 싶고, 잘 쓰고 싶어 한다. 글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꿈꾼다. 나의 소소한 일상이 아름다운 글로 완성되길 원한다.
나는 나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는 내 안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안 해 본 도전은 다 실패고, 망설인 시간은 다 낭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