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troit Institute of Arts Art Museum
Jean-Léon Gérôme, Saint Jérôme, 1874, oil on canvas painting, 69 x 93 cm., Städel Museum
때는 바야흐로 난생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해의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어느 날, 나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찾았고 그곳에서 마주한 작품이 바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였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예상보다 훨씬 큰 그 작품이 눈앞에 펼쳐지던 순간, 나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다. 마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물론 실제로 비수를 맞아본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랄까).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심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감정이 충격인지 감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는 미술 작품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름 문학도를 자처한 나로서는 이전까지 문학 작품을 보고 울컥하거나 통렬한 감동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미술 작품을 보고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낀 적은 난생처음이라 당황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왜 하필 이 작품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을까?
내 인생이 이 작품을 보고 바로 미술사 전공으로 방향을 바꿀 만큼 극적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작품을 본 뒤 열정적으로 미술사를 탐구하는 여정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되돌아보면 이 작품을 계기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미술 교과서에서 봐서 익히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처음 직접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오래도록 맘에 남았다. '왜 나는 문학이 아닌 시각 예술 작품을 보고 이렇게 깊은 감동을 받았을까?'라는 의문이 나를 미술사로 이끌었고, 그 이후에도 이 작품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
몇 해 전, 우연히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만한 글을 발견했다. 그것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의 논문이었다. 사실 내가 작정하고 찾았다면 진작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서야 우연히 접한 것이다. 보임은 이 논문에서 <잠자는 집시>에 등장하는 사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화가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스스로를 아카데미 화풍의 화가로 여겼고, 장-레옹 제롬이나 윌리엄-아돌프 부그로와 같은 아카데미 화가들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2. 제롬은 당시 열강의 식민지 개척 시기에 아카데미 화가로서 개척단을 수행하며 그 곳의 자연과 생활상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오늘 날로 치면 내셔널 지오그래픽 수준의 사진 작가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그는 그 곳에서 실제로 사자를 볼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3. 제롬은 그 광활한 곳을 돌아다니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했고 그것이 그의 작품 속에서 유독 사자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작가의 이름 장-레옹 제롬 (Jean-Léon Gérôme)에서 '레옹'은 사자를 뜻하며, 사자와 연관이 있는 성인 '성 제롬'과 이름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의 주장에 따르면 화가 제롬이 당시 아카데미 화가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아카데미의 관료주의 체제에서 고독을 느꼈을 것이라고 한다. 보임은 제롬의 작품에서 사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보임은 나아가서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 속의 사자의 출처는 장-레옹 제롬의 사자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한다. 이는 루소 자신이 아카데미 화가 장-레옹 제롬을 동일시 하였고, 그의 작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 제롬 역시 사자와 연관된 에피소드가 있다는 것인데, 성 제롬이 사자굴에서 사자 발의 가시를 빼 준 덕에 잡아먹히지 않았던 일화가 그것이다.
자, 이제 루소의 <잠자는 집시>로 돌아가보자.
<잠자는 집시>에 나오는 사자는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호기심 많고 온순한 동물처럼 보인다. 루소는 이 사자가 집시를 지켜보면서도 그녀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 자신의 작품을 시청에서 구매해주기를 요청하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떠돌이 흑인 여성, 만다린 연주자는 물 단지를 옆에 두고 누워서,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달빛의 효과 탓에 매우 시적이죠. 장면은 완전히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집시는 동양 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루소의 설명처럼, 이 장면은 황량한 사막과 동양적인 옷을 입은 집시가 어우러져 매우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 면에서 루소의 사자는 장-레옹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라는 작품 속 사자들과 많이 닮아있다. 제롬의 사자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 굶주린 맹수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사자들은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동물처럼 표현되어 있다.
제롬의 사자 그림들의 제작 의도는 물론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의미도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직접 정글 탐험은 고사하고, 사자를 본 적도 없이, 파리의 식물원을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정글을 탐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하는 루소와 정글과 사막 지대를 누비며 사자를 직접 보았을 장-레옹 제롬이 사자에 대해 느꼈던 감성은 일맥상통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레옹 제롬의 작품 중에서 사자 한마리가 그려진 그림은 제목마저도 알기 쉽게 <고독>이다. 저명한 아카데믹 화가였던 장-레옹 제롬도 때론 비평가들의 놀림을 당하던 일요화가였던 앙리 루소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것일까?
그 작품이 그려진 지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낯선 뉴욕에서 루소의 작품을 봤던 나는 왜 그토록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나의 경우, 그것은 외로움과 안도감의 공명 때문이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난생 처음 낯선 타국에서 홀로 떨어져 생활하면서 때로는 때때로 위험하다는 뉴욕 거리를 다니면서 외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었다. 그런 나는 광활한 사막에서 홀로 누워 잠든 집시에게서 동병상련의 감동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엄청난 위력을 갖추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집시를 지켜주는 사자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힘센 사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준다니! 그 이상의 든든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광활한 사막에 홀로 놓인 사자와 집시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함께 웃고 있는 달님과 아련한 별빛으로 가득한 짙푸른 밤하늘로 인해 더욱 시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 모든 것을 인지한 순간, 나는 그 작품과 공명하며 엄청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에도 수없이 MoMA를 방문해봤고, 그때마다 첫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다시 그 작품을 봤다. 그리고 방문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첫날의 감동은 약간씩 희미해져갔다. 그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 전시실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 그 작품이 있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20살 언저리 뉴욕의 외로웠던 그 시절,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큰 위안을 받았고, 그 작품을 통해 무한한 안도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P.S.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는 영어로는 Sleeping Gypsy, 불어 원제로는 La Bohémienne endormie다.
알버트 보임 (Albert Boime)의 아티클의 원제와 출처: “Jean-Léon Gérôme, Henri Rousseau’s Sleeping Gypsy and the Academic Legacy,” Art Quarterly Vol. XXXIV: No.1 (1971): pp.3-29. [온라인 상으로 무료로 읽을 수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길 http://www.albertboime.com/Articles/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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