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발을 들였을 때, 나는 《잠자는 집시》라는 작품과 마주했다. 전시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큰 작품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이 밀려왔다.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 느낌. 물론 실제로 비수가 꽂혀본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심쿵'이었을까, 충격과 감동이었을까. 그 순간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문학 작품을 읽고 울컥하거나 감동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미술 작품 앞에서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의문이 피어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물론 누구나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물 흐르듯 살아가지는 않는다. 나 역시 이 작품을 본 그 순간 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고, 원탁의 기사가 성배를 찾듯 열정적으로 탐구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 작품을 본 이후 '왜 나는 하나의 시각 예술 작품을 보고 그토록 깊은 감동을 받았을까?'라는 궁금증으로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다. 그리고 미술사를 공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 감춰진 수수께끼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마음 한편에 품고 지냈다.
이미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알던 작품이었는데, 처음 실물을 대했을 때 받았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몇 해 전, 비로소 그 오래된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Albert Boime)의 논문이었다. 사실 작정하고 찾아봤다면 진작 발견할 수 있었을 자료였지만, 나의 탐구가 그리 집요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보임은 19세기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 장-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를 추적하며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첫째, 화가 앙리 루소는 독학파였지만 스스로를 아카데미풍 화가로 여겼고, 윌리엄 부게로나 장-레옹 제롬의 화풍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따라서 루소는 제롬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제롬은 열강의 식민지 개척 시대에 아카데미 화가 자격으로 탐험단을 수행하며 현지의 자연과 생활상을 기록했다. 오늘날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와 같은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자를 실제로 보고 그릴 기회가 많았다.
셋째, 제롬은 광활한 사막을 돌아다니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자신과 동일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Jean-Léon'이라는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Léon'이 들어가고, 성인 'Gérôme'은 유명한 성인 St. Jerome과 발음이 같다는 점을 든다.
성 제롬은 사자굴에 던져진 기독교인들 중에서 사자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어 사자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제롬도 이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Jean-Léon Gérôme, Saint Jérôme, 1874, oil on canvas painting, 69 x 93 cm., Städel Museum (기독교인들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잡아먹지 않으면 살려주는 벌을 행했을 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사자가 성 제롬을 살려주었다는 유명한 전설. 물론 제롬도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도 그렸다.)
제롬의 작품에서 사자는 대부분 광활한 자연을 홀로 거닐거나 앉아서 사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임은 제롬이 아카데미 화가로서 명성과 지위를 얻었음에도 경직된 관료주의와 주변과의 관계에서 항상 고독함을 느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으리라 추측한다.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사자들은 동물의 제왕다운 위엄은 가득하지만 위협적 맹수의 모습은 아니다. 지하 굴을 빠져나오지 않은 사자들도 피에 굶주린 맹수라기보다는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루소의 《잠자는 집시》에 등장하는 사자 역시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고 호기심 많고 온순한 모습이다. 루소 자신이 작품을 홍보하며 쓴 편지에서도 그 의도를 명확히 했다:
"떠돌이 흑인 여성, 만다린 연주자는 물 단지를 옆에 두고 누워서,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달빛의 효과 탓에 매우 시적이죠. 장면은 완전히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집시는 동양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직접 정글을 탐험한 적도, 사자를 본 적도 없이 파리 식물원을 방문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루소와, 사막 지대를 누비며 사자를 직접 보았던 제롬. 두 화가가 사자에 대해 느꼈던 감성은 일맥상통하지 않았을까?
제롬의 또 다른 작품 《고독(Solitude)》은 제목부터 명확하다. 저명한 아카데미 화가였던 장-레옹 제롬도, 비평가들의 조롱을 당하던 일요화가 앙리 루소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작품이 그려진 지 100여 년이 흐른 후, 루소의 작품을 본 나는 왜 그토록 강렬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외로움'과 '안도감'의 공명이었을 것이다.
난생처음 낯선 타국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면서, 때때로 위험하다는 뉴욕 거리를 걸으며 불안해하던 나에게, 누워 있는 집시는 동병상련의 존재였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을 지녔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집시를 지켜주는 사자의 모습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힘센 사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준다니! 그보다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광활한 사막에 홀로 놓인 사자와 집시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 그 가운데 미소 짓는 달과 아련한 별빛으로 채워진 짙푸른 밤하늘이 자아내는 시적인 분위기.
그 후에도 MoMA를 수없이 방문했고, 그때마다 첫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그 작품을 다시 봤다. 처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빛이 바래갔다.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자리에 그 작품이 있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스무 살 언저리에 뉴욕에 있던 나는 외로웠고, 그 작품을 보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으며, 그 작품으로부터 무한한 안도감을 선사받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