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오르세 특별전에서 발견한 예술의 깊이
오랑주리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세잔과 르느와르
2025.9.20 ~ 2026.1.25
예술의 전당 디자인미술관
전시 오픈 첫날, 나는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앞에 서 있었다. 사실 평소라면 오픈 직후의 인파를 피해 시간이 지난 후 찾는 편인데, 이번엔 달랐다. 예정된 특강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올해 내가 한 가장 탁월한 결정 중 하나였다.
* 전시장 내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작품 사진은 못올리고 전시의 구성과 특징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전시의 장점에 대해 기술하는 점 양해바란다. 작품 감상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해보시길 바란다
지하로 내려가 태블릿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대기번호를 받았다. 예상 대기시간 30분이 실제로는 1시간 20분이 되었지만, 그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기프트샵을 둘러보고 도록을 훑어보며 전시에 대한 기대를 키워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관람객 관리였다. 밖은 북적였지만, 막상 전시장 안은 쾌적했다. 작품 하나하나와 조우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 있었다.
이 전시가 단순한 작품 나열이 아님을 알게 된 건 큐레이션을 살펴보면서였다. 이탈리아, 스위스, 홍콩,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장정의 여정. 오랑주리 미술관이 주도한 이 전시의 기획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구성
Section 1. 세잔과 르누아르
Section 2. 야외에서 – 풍경화
Section 3. 정물에 대한 탐구 – 정물화
Section 4. 인물을 향한 시선 – 초상화
Section 5. 폴 기욤의 수집
Section 6. 두 거장과 피카소 - 20세기에 남긴 유산
여기에 부연설명을 좀 보태자면, 세잔과 르느와르의 작품세계를 비교하면서 조명하는 전시로 서양미술사에서 회화의 다섯가지 장르 -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장르화, 정물화 - 중에서 세잔과 르느와르가 작업하지 않았던 역사화와 장르화를 제외하고 장르별로 구분해서 전시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동안 세잔을 어려워했다. 일반인 대상 강의에서 세잔을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본질적 형태를 파악하려는 그의 철학적 작업은 설명하기 어려웠고, 비슷비슷해 보이는 그림들로 수강생들의 흥미를 끌어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세잔과 르누아르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두 작가의 대비를 통해 각자의 특장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세잔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길이 보였다.
르누아르 역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작가였다. 아름다운 여인들과 부드러운 색채의 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내게, 전시장의 스냅사진들은 충격이었다. 류머티즘으로 손가락이 굽어진 채 붓을 손에 묶어가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그 고통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보며 새삼 숙연해졌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발견은 폴 기욤과 장 발테르의 '발테르-기욤 컬렉션'이었다.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그리고 자본이 만나 탄생한 이 컬렉션이 없었다면 오늘의 전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컬렉터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이 어떻게 예술사에 기여하는지를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51점이라는 작품 수가 적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오해였다. 엄선된 작품들이 넉넉한 공간에 여유롭게 전시되어, 오히려 각 작품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양보다 질의 승리였다.
이번 전시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전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관람객 관리의 탁월함: 쾌적한 관람 환경 조성
전시 기획의 참신함: 세잔과 르누아르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관점
미술사적 깊이: 단순한 감상을 넘어선 학습과 성찰의 기회
전시를 마치고 기프트샵에서 엽서를 고르며 생각했다. 작품 사진 촬영이 금지된 아쉬움이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카메라 너머가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만난 그 작품들의 감동은 오롯이 마음에 새겨졌다.
세잔의 집요한 탐구와 르누아르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두 거장이 만나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다시 한번 예술의 힘을 믿게 되었다.
관람 정보
기간: 2025.9.20 ~ 2026.1.25 (얼리버드 티켓을 예매한 분이라면 11월21일까지 관람하셔야)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전관
작품: 세잔·르누아르 유화 51점, 사진·영상 70여 점
팁: 현장 대기시간이 있으니 여유를 두고 방문하세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마음에 새기며 관람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