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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버터젤리 Dec 04. 2022

아름답지만은 않은

두 번째 시간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냈냐는 상담사의 질문에 나는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적듯 느릿느릿 대답했다. 잘 지냈다는 대답과 달리 나의 진심은 그러지 못한 편에 더 가까웠다. 처음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7일의 시간을 보내며 불쑥 고개를 들기 시작한 수많은 생각들과 미묘한 감정들을 하나씩 마주해야 했고 내겐 이 모든 것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상담이라는 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은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 결과가 무엇이든 모른 척 덮어두는 것보다는 직접 마주하는 방향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두 번째 시간, 이번에도 도화지 한 장이 내 앞에 놓였다.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한번 적어볼 거예요. 나 자신을 표현한다면 어떤 점들이 있는지 적어보고 하나씩 같이 이야기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먼저 도화지의 가운데에 한 글자를 썼다. ‘나’ 그리고는 그 주위로 하나씩 생각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적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주관이 뚜렷한’, …


“그럼 지난주에 하던 이야기에 이어서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부터 조금 더 해볼까요?”


외롭다는 말이야 투정처럼 주변 친구들에게 많이도 해봤지만 고작 두 번째 보는 상담사의 질문에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고민이 되어 나는 뜸을 들였다.

 

“음. 그러니까 제가 잠깐 살았던 곳은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니카라과라는 아주 작은 나라였어요. 그곳에서도 제가 1년 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학교는 수도 마나과에서 꽤나 떨어진 작은 도시에 위치한 어느 사립학교였고요. 영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교내 대부분의 수업이 영어와 스페인어로 진행됐어요. 저는 그곳에서 이제 갓 학교에 들어온 만 3살의 코 흘리게 아이들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했고요.”


계속해서 이어간 나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했던 스무 살의 나는 남미의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에 스물한 살이 되던 겨울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경영이라는 애매모호한 전공을 선택한 내게 있어서 그 제안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떠날 수 있는, 당시의 재미없던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쯤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지구 반 바퀴, 28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그곳에서 모국어인 스페인어마저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면 알파벳 노래를 부르거나 색연필을 쥐어주고 색깔 공부를 하는 게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낮에는 교실을 돌아다니며 수업을 하고 오후 세 시가 되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 남았다. 학교 부지 내에 위치한 숙소에 가기 위해 장화로 신발을 갈아 신고는 모두가 떠난 교무실에서 보안 시스템을 작동시키고는 숙소로 향하는 일은 내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과 같은 것이었다.

붉은색의 황토 흙 속으로 푹푹 빠지는 장화를 한 발짝 한 발짝 힘겹게 옮기다 보면 계곡을 서쪽으로 끼고 푸른색의 단층집이 한 채 나타났다.


평화롭다 못해 적막감이 흐르는 그곳은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내게는 철저한 고립의 공간이었다. 시끌벅적하게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너무나 즐거웠지만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고 나면 견디기 힘든 고요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외딴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스물한 살의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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