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장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시간과 집중력이 요구되지요.
특히 소설에서는 작가의 표현력에 따라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의 모습이 많이 달라집니다.
저는 작가가 묘사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활자를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서는 그에 따라 데생이 시작되고 채색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문장 속 형용사, 부사, 동사에 따라 2D의 그림들은 3D가 되어 살아 움직입니다. 음악을 묘사하는 작가들도 있어, 3D 그림에 더하여 배경 음악이 깔리기도 하지요. (가끔 소설 속에서 제가 모르는 음악이 등장하면 상상속 배경음악을 완성할 수 없어 매우 답답한 나머지 그 음악을 찾아서 들어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소설 읽기에서의 저의 상상 프로세스는 나름의 절차와 동시다발적인 복잡성을 지니고 자동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도 건너 뛰기 어려워 일정 수준 이상의 시간이 요구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소설 읽기는 문장 하나하나에 투입한 집중력에 비례해서 매력과 감동이 크게 다가옵니다. 따라서 저에게 좋은 소설이란 저로 하여금 엄청난 집중력을 앗아가는 소설인 것이죠.
가끔 소설 읽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날,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서적을 선택합니다.
제겐 지식의 함양, 정보의 취득, 인문학적 사고를 위한 책들이 여기에 속하는데요.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는 것은 마치 100m 달리기와도 같습니다. 소설처럼 상상 프로세스는 요구되지 않지만, 작가가 전해고자 하는 메세지를 이해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기존 생각과 연결 및 사고를 확장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작업은 저에게 상상력과 같은 창의성의 영역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기술적인 영역 즉 테크닉과 스킬에 좌우되는 부분으로 여겨집니다. 마치 특허 요건 중 산업상 이용가능성, 신규성 및 진보성을 충족시키면 발명이 성립하듯 또는 TRIZ와 같은 문제 해결 기법(더하기, 빼기, 치환하기 등)을 적용하듯, 작가의 핵심 메세지만 잘 파악하면 생각의 연결과 사고의 확장은 보유 지식과 경험에 기반하여 비교적 짧은 시간 내 가능한 것이죠. 특히, 작가의 핵심 메세지 파악에서 멈출 경우, 그 이상의 연결과 확장까지 시도하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빠른 독서의 완료가 가능해 집니다.
이 작업을 100m 달리기에 비유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존 생각'에 대한 축적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축적은 독서로부터 비롯될 것이고요. 축적된 자신만의 '생각'이 없는 분야와 관련된 책을 읽었을 때 독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저 역시 제가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책을 읽을 때는 소설을 읽을 때처럼 긴 호흡과 시공간적 여유를 가지고 시작하곤 합니다. 마라톤을 준비하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한민국 성인으로서 가장 쉽게 접근 가능한 책은 사회과학 분야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뉴스를 통해 익숙한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그나마 낮고 공감대 형성이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과학 서적이 다루고 있는 메세지는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직시하면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직접 겪고 있는 것들이기에 우리에게는 저마다 그 문제에 대한 '기존 생각'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독서는 인간의 내적 기틀을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기틀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 다듬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러한 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고는 외부로부터의 직/간접적인 소스가 들어와야 작동하는데 그 소스를 얻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독서입니다. 혹자는 독서가 아닌 인터넷, SNS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도 이러한 소스를 확보할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하겠지만, 미디어를 통한 소스는 짧은 시간 내 보여주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유익하고 유용한 컨텐츠일지라도 대부분 메세지 지향적이며 단편적입니다. 정-반-합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지요. 서로 다른 생각 간 다툼의 과정을 거치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논리를 형성한 후 그 논리들이 모여 자신만의 내적 기틀이 완성됩니다. 이 내적 기틀은 가치관, 신념, 줏대 등으로 일컬어집니다. 하지만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내적 기틀이 건강하고 단단하게 확립되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편향적인 독서와 정-반-합 변증법적 사고의 부적절한 작동은 오히려 독서를 하지 않은 사람보다 더 위험한 내적 기틀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요.
2023년 기준, 대한민국 독서 통계를 살펴보니 1년간 1권 이상 책을 읽은 사람의 비중이 48.5%였습니다. 즉, 독서 인구가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이죠. 물론 50-60대를 제외한 10~40대의 독서 비중은 50% 이상으로 밝혀졌지만 책 그리고 독서에 대한 인식과 지위가 더이상 예전같지 않다는 씁쓸함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서의 중요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독서가 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해결책 모색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서를 권장하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독서가 취미 활동의 일환이라면 왜 우리는 독서를 서로 권장하고 독서하지 않는 사람을 나도 모르게 얕보거나 독서하지 않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요? 독서 아닌 다른 취미 활동(낚시, 축구, 골프 등)은 무턱대고 아무에게나 서로 권장하지 않잖아요. 한국 사회에서 독서는 더이상 취미 활동이 아닙니다. 독서는 금연이나 금주와 같이 백해무익과 반대되는 일종의 善으로 인식됩니다. 다만, 금연과 금주는 건강 상 이롭다는 의학적 연구 결과가 뒷받침해주고 있으나 독서는 아직 그 이로움에 대해 연구 결과로서 입증되지 못했기에 왈가왈부가 있는 것이겠죠. 독서의 효용성은 드러나는 신체적 특성이 아닌 내면적 특성에 영향을 끼치므로 입증이 어렵습니다. 하물며 입증이 완료된 금연과 금주에 대해서도 기호식품으로서 선택권을 주고 권장하는 것을 자유에 대한 침해로 여기면서, 학술적으로 그 효용성이 입증되지 않은 독서에 대해 우리는 권장할 수 있을까요? 독서 인구가 줄어들면서 독서 권장 문화가 많이 사그라 든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는 정말 독서를 사랑하거나 취미 활동으로서 독서가 주는 후광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독서를 하는 것이지, 독서를 권장한다고 해서 시작하는 문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제가 생각하는 독서의 의미와 가장 쉽게 독서를 시작할 수 있는 도서 분야에 대한 생각을 밝혔지만, 독서를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독서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권장되어야 할, 그리고 권장할 만한 근거가 명확히 입증되어 있는 더 시급한 것들이 많아 보입니다. 또한 독서는 권장한다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저해하는 요인들을 성찰하고 해소시켜야 자연스럽게 독서율이 증가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통해 제가 얻고 있는 소중한 경험과 지식들을 글을 통해 공유하는 오지랖을 지속할 생각인데요. 이것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 느낌을 기록으로 남겨 오래도록 생생하게 간직하려는 저 스스로의 욕심, 그리고 이 맛있는 음식에 대해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기쁨을 느끼도록 하고 싶은 공동체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 오지랖은 이만 끝내고 남은 연휴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