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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썬 Jun 21. 2021

기사님, 잠시만요. 정말 여기서 내리신다고요?

느림 속의 아름다움과 가치있는 느긋함이 춤추는 그 곳, 산타크루즈

    "버스 5분 남았대! 뛰자!"

    "그 정도면 기어가도 돼. 그냥 가. 여유롭게 살아."


    여유로움과 느긋함이 공기를 가득 채우는 산타크루즈에서는 구글맵에 나오는 예상 시간보다 시내버스가 10분 정도 늦는 것은 일도 아니다. 오히려 제시간에 도착하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처음 몇 번은 성격이 '빨리빨리' 민족 중에서도 특히 성질이 급한 편이라 욱할 때가 꽤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샌프란시스코만 해도 정류장마다 버스도착정보 안내판이 정말 잘 되어 있고 심지어 시간도 딱딱 맞게 도착했는데 아무리 작은 도시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단 생각만 들었다. 아니, 오히려 궁금했다. 우리는 분명 21세기에 살고 있는데 대체 왜 그런 걸까? 심지어 미국이잖아!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빨리 내게 찾아왔다. 산타크루즈의 차가운 겨울 날씨에 오들오들 떨며 버스를 겨우 탔던 그 날, 나는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충격을 맛보았다.


    산타크루즈 내 모든 시내버스는 하나같이 승객이 탑승하거나 내릴 때면 그 방향으로 버스가 살짝 기울어진다. 저상버스라 어린 아이도, 거동이 불편한 분들도 아주 쉽게 버스에 올라타고 내릴 수 있다. 매우 안전히.  양 손 가득 짐을 들고 있던 그 날의 나 역시 계단을 오르는 불편함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기숙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두 정거장 정도 지나서였나 처음 보는 광경이 벌어졌다. 여느 때처럼 버스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채 승객들의 탑승을 돕고 있었는데 갑자기 버스 기사님께서 안전 벨트를 푸셨다. 그러고는 운전석에서 슥 나오신 뒤 버스 밖으로 내리셨다. 창밖 구경에 흠뻑 젖어있던 나는 놀란 마음에 '타이어 펑크가 난 걸까? 그럼 난 이 짐들을 들고 어떡하지? 밖은 엄청 추운데? 내려야하나' 등등 이미 상상의 나래를 실컷 펼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버 가격 알아보는 중이었다. 눈 깜빡 할 시간이었지만 여러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던 그 때, 기사님이 다시 돌아오셨다. 휠체어를 탄 한 승객과 함께. 기사님은 승객의 휠체어의 탑승을 돕고 자리를 잡아드리기 위해 버스에서 내리신 것이다. 직접 휠체어를 밀어 버스 내 안전장치에 설치하셨고 체크를 여러 번 하신 후 아무렇지 않게 운전을 이어가셨다. 그 승객이 내리실 때도 매한가지였다.

휠체어를 버스 안전장치에 고정시켜주고 계시는 버스 기사님.

    더욱 놀라웠던 건 미리 탑승해있던 승객들의 태도였다. 재촉하는 사람도, 빤히 쳐다보는 눈빛으로 일종의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태연했고 여유로웠으며 기사님과 '엄지 척' 제스쳐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오히려 돕겠다고 벌떡 일어나시는 분들도 계셨다. 버스 출발 전, 휠체어를 탄 승객 분은 “Thank you, buddies”라며 돌아보시진 못해도 감사의 인사를 훈훈히 건네셨다. 그 말을 듣는 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주차에, 장치 설치까지 꽤나 시간이 걸리는 동안 버스 안을 감쌌던 나에게만큼은 어색했던 침묵의 공기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했고 따스하였으며, 부드러웠다. 누군가의 기다림으로부터 오는 초조함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서늘했던 어느 겨울 날, 나의 추위를 달래주었던 건 뜨거운 커피 한 잔도, 히터의 온기가 아닌 사람과 사람 간의 다정한 온기와 배려였다.


    이 날 이후 산타크루즈 시내버스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여도 전혀 답답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았다. '아, 따스한 무언의 대화를 다함께 나누며 오는구나. 무슨 이야기일까?" 머릿속 물음표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어떤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당연하지만 소중한 이야기가 펼쳐졌을 지 궁금했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버스가 늦는다면 그 건 내가 더 일찍, 미리 준비하면 해결될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빠르다고 옳은 것만은 아니다. 느리다고 틀린 것만도 아니다. 저마다의 속도로 달려나가는 이야기 속에는 그만큼 저마다의 가치가 담겨있다는 것, 그게 정답이다.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 안의 사람들과 그 안에서 흐르던 공기는 나에게 “아름다운 느긋함”이 무엇인지 무심히 보여주었을 뿐이고 그 점이 산타크루즈에서 배운 나의 첫 번째 교훈이다. 느림 속엔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것을 우린 "배려"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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