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89
리처드(Richard)가 옥상에서 10분쯤, 햇살과 꽃, 멀리 푸에고(Fuego) 화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독 햇살이 좋네요. 푸에고 화산은 활동을 쉬고..."
그의 말을 내가 이었다.
"전 제게 다가오는 모든 시간을 즐겨요. 구름이 푸에고 화산과 아카테낭고(Acatenango) 화산을 가린 날도, 푸에고 화산이 연기를 높이 뿜는 날도, 오늘같이 활동을 쉬는 날도... 사는 일이란 시간을 타는 서핑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파도가 좋은 날은 파도를 타고 파도가 없는 날은 해변에서 선탠을 하고 흐린 날은 집에서 책을 읽으면 되니... 파도를 탓하지 않는 서퍼로 사는 것이 중요한 듯싶습니다."
그가 무표정했던 얼굴에 표정을 만들며 말했다.
"불평 없는 서퍼! 전 오늘 떠납니다."
미국에서 온 62살의 그는 2년 전부터 중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영어강사로 살고 있다. 그전의 커리어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해 미국을 떠나 영어 강사를 시작했다.
며칠 전 과테말라 체류만료에 관한 이슈로 대화할 때 그가 말했었다.
"6개월 강사 계약이 곧 만료되어요. 계약이 만료되면 저도 과테말라 체류비자를 새로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과테말라의 다른 학교에서 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할지..."
결국 과테말라에서 강사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페루 쿠스코에서 6개월 자리를 구해 오늘 떠난다고 했다.
공항행 셔틀 운전자가 그를 데리러 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이미 싸놓은 짐을 가지고 나왔다. 백팩 하나와 캐리어 하나. 그것이 그의 인생 짐의 모두였다.
"남미로 오시면 쿠스코에서 다시 만나요!"
"우리가 남미로 갈 것은 맞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1년 뒤가 될 수도 있고..."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요. 6개월 뒤에 계약 연장을 해서 다시 6개월을 더 그곳에 있게 될지, 아니면 6개월 뒤에 안티구아로 돌아오게 될지... 하지만 시간의 서퍼는 파도를 탓할 수는 없지요."
리처드는 그렇게 안티구아에서의 6개월 삶을 마감하고 떠났다. 강사비는 숙식비를 충당하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인생의 다른 파도를 즐기는 맛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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