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 Monica's [en route]_297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강민지
#1
평소보다 늦게 침대에서 나왔다. 침대에서 게으름을 피워도 다른 이에게 방해될 것 없다는 자유로움 때문일까, 눈을 떠고도 침대를 벗어나기가 싫었다. 커피 생각이 침대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내의 책상 위에 커피와 재활용 종이컵으로 만든 드리퍼, 종이 필터가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다. 부엌으로 가서 물을 받아 얹었다. 커피포트가 끊는 동안 아내가 알려준 부엌살림을 살폈다. 양념들을 찾아본 다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실 아래에서 두 번째 칸이 우리 몫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빼곡한 내용물을 살폈다. 삶은 계란, 구운 바나나, 조리된 토마토 수프 등이 빼곡하다.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된다.
끓은 물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의자에 앉았다. 평소 아내가 하던 방식대로 컵 위에 연필 두 자루를 체 걸이로 놓은 다음, 바닥이 십자로 뚫린 종이컵 속에 커피 필터를 넣고 간 분쇄한 원두를 두 숟가락 넣었다. 물을 부으니 마침내 아내가 커피를 내릴 때마다 방안을 채웠던 그 매혹적인 향기가 여전히 흐릿했던 내 뇌를 깨웠다.
커피가 추출되는 동안 옆을 돌아보니 과일과 빵과 땅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없는 동안 내 혼자의 끼니로 준비해둔 것들이다. 그렇다. 아내가 떠났다.
우리 부부의 2년 가까운 해외 유랑 동안 암묵적인 역할 분담이 있었다. 내 역할은 막 도착한 낯선 도시의 정체를 파악하고 어떤 곳이 더 안전할지를 살핀 다음 어떻게 현지인들의 삶에 녹아들 수 있을지에 대해 방안을 내는 일과 그동안 수집한 데이터를 보관하고 기록을 담당하는 일이다. 아내는 숙소 사람들과의 친화와 식사 준비, 장을 보는 일을 비롯한 그 외의 모든 일이었다. 그 구분은 세상의 모든 생물과 사물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그 명사의 관사로 성별을 나타내야 하는 인도유럽어족의 여러 언어들처럼 불명확한 것이긴 했지만 우리 부부 사이에서는 불평이나 분쟁 없이 실행되어왔다.
그 관행은 종종 숙소의 다른 문화권 동료들로부터 지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미국에서 온 파멜라(Pamela) 부인은 내게 두어 번 말했다.
"민지가 너무 힘들어요. 홀로 시장 다녀오고, 식사 준비하고, 빨래하고..."
나는 그것을 반박하는 대신 동조하는 식으로 넘기곤 했다.
"그래요. 민지가 착해요!"
이런 시각은 숙소의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것 같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을 뿐이다. 아내가 미리 만들어둔 음식으로 늦은 아침을 홀로 하다 보니 파멜라 부인이 참지 못하고 그 얘기를 입 밖을 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우리는 지난 12월과 1월에 걸쳐 과테말라의 남서부 고지대에 위치한 아티틀란 호수 주변에 산재한 17개 마야인 마을들을 탐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숙소의 주인인 마틸다(Matilda)의 고향인 칵치켈 마야(Kaqchikel Maya)인들이 사는 산타 카타리나 팔로포(Santa Catarina Palopo) 마을을 베이스캠프 삼아 각기 다른 마야 부족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배로 쉽게 접근 가능한 관광지화된 마을들 말고도 치킨 버스나 더 작은 로컬 버스로 접근할 수 있는 산 너머마을들로 갈 때는 나 홀로 다녔다. 어떤 환경인지,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원주민 마을을 찾아가는 일에 아내를 동행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 여겼다. 아침부터 밤까지 높은 산을 올라야 하거나 마야 사제들이 가는 굴의 기도터를 찾아가는 일은 체력적으로도 힘든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현지인의 차와 바이크를 히치하이크해야 하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히치하이크의 확률을 떨어뜨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아내는 다른 오지 소수 마야족들과 접촉하는 일이 나보다 적었다.
며칠 전, 마틸다가 산타 카타리나 팔로포 마을의 부모님을 뵈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녀의 부모님인 미구엘(Miguel)과 마리아(Maria) 어르신과 잘 지낸 것을 알고 있는 그녀가 함께 갈지를 물었다. 부모님댁에서 이틀, 다른 마을 친구 집에서 사흘을 보내고 돌아오는 일정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내만 동행하는 우리 부부의 결론을 전해주었다. 이번에는 아내 혼자 각기 다른 마야 원주민들을 대면해 보면 좋겠다는 내 의사가 좀 더 강하게 반영된 결정이었다. 아내는 남편이 동행하지 않은 오지 여행을 잠시 망설였지만 기꺼이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어제 떠나는 마틸다와 아내를 배웅하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홀로 있는 고요함도 잠시, 마음에 점점 파랑이 일기 시작했다.
사실 아내 없이 다섯 밤을 보내는 일은 식사를 홀로 챙겨야 하는 일보다 아내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는 염려가 큰일이다. 도착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은,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에 도착했다는 왓츠앱 메시지가 왔다.
"10분 전에 어르신 댁에 도착. 할머니·할아버지는 6시에 주무셔서 마틸다 여동생 식구들이 대신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지금 저녁 식사로 차와 토르티야 먹고 있어요."
그제야 파랑이 좀 가라앉았다. 나도 함께 있을 때는 하지 않던 문장으로 답했다.
"많이 늦었군요.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할머니·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일찍 주무시는지는 몰랐네요. 새벽 4시에 기상하는 분들이니... 나는 당신이 차려 놓은 저녁을 이제 먹었습니다. 오트밀만 먹고 바나나 구이는 내일 아침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홀로 식사를 하려니 그동안 당신의 노고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여정 잘 누리고 오세요."
아내 없는 날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내 책상을 떠나려 할 때 오늘의 첫 메시지가 왔다.
"왈터네는 성당 앞에 과일 가게를 냈습니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 모두가 당신을 찾습니다. 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