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라는 키워드를 통한 문학작품 독해
나는 문학사를 잘 모른다. 나는 그저 독자일 뿐이다. 그러나 가볍게 문학을 즐기는 와중에도 ‘시선’이라는 키워드가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변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근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부터 현대의 한국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시선의 관점에서 문학사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정신을 탐구하는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식은 일천하기 때문에 감히 문학사를 다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다만 내가 즐겁게 읽은 여러 작품들을 시선이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두 가지로 분류하고 분석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묶으려고 할 뿐이다. 보건대,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둘 중 하나이거나 둘의 대립이다. 내가 아는 가장 오래된 전거로부터 나는 두 가지 시선을 메두사와 테이레시아스의 대립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메두사는 바라보는 것으로 대상을 돌로 만드는 괴물이다. 테이레시아스는 맹인 예언가이다. 그가 왜 맹인이 되었고 어떻게 예언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후의 논의에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는 특징이다. 반면에 메두사는 더없이 분명하게, 흔들림 없이 명료하게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진정한 것, 살아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두 가지 대립되는 시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메두사의 시선은 대상을 고정시키고, 더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상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시선이다. 반면에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은 더없이 불분명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없이 명증하게 통찰하는 시선이다. 그래서 메두사의 시선은 거짓된 단순성이고,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은 혼란스러운 진리이다.
생각건대 카프카 역시 나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변신에 대해서는 예전에 따로 다룬 적이 있으니 이번에는 다른 단편들 위주로 다뤄보겠다. 그의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서 장교는 판결 장치이자 처형 장치인 ‘기계’를 통해 ‘법’이 온전하고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처벌을 위해 “정당하여라”(Be just)라는 글자가 장교의 몸에 새겨지려는 순간, 그 기계는 부서진다.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작품 속에서 처형 기계는 그 자체로 판결인 법이다. 이 기계는 죄인의 몸에 죄인의 죄를 새긴다. 죄인의 몸에 새겨지는 죄목은 법에 의해 판결이 가능한, 즉 법 내에서 완벽히 설명될 수 있거나 그렇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장교의 몸에 “정당하여라”라는 문구가 새겨지려는 순간 이 기계는 부서진다. 맥락상, ‘정당함’ 혹은 ‘정의’는 법의 내부에서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통념상 이는 다소 이상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법에게 정의로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법은 정의로우며 그 판결은 정당하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
카프카는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법은 정의와 다르다. 단지 법은 편할 뿐이다. 법은 너무나도 쉽게 판결을 내린다. 그래서 복잡할 일이 없다. 작중에서 장교가 수인에게 어떤 복잡한 심문 과정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그는 ‘규칙에 따라’라는 속 편한 명제에 따라 사람을 심판한다. 일단 장치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은 자동적이다. 그래서 이 과정은 어떻게 보면 이중 살인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심판받는 자는 죽고 심판하는 자는 이미 사람이 아닌 그 무엇처럼 되어버린다.
이 구도 속에서 카프카는 메두사의 눈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더없이 단순하고 더없이 명증하게 ‘감히’ 정당함을 판결하고 무언가를 정죄하려는 시도는 메두사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그 시선은 오만하다. 그래서 자신이 포섭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채 감히 “정당하여라”라고 죄인을 규정한다. 마치 메두사가 사각에서 날아오는 페르세우스의 검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법을 대하는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이라 할 만한 자세는 다른 작품인 「신임 변호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 중 하나인 변호사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의 말이었던 부케팔로스이다. 한 때 그는 대왕의 지휘를 따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난 후, 사람들은 목표를 잃었다. 저마다 제각기의 목표를 따라 서로에게 칼을 휘두른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법이 필요하며 부케팔로스는 법전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의 몰두는 색다르다. 단순히 법에 따라 집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고서를 읽는다. 판결로서의 법, 집행으로서의 법을 정지하고, 법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법은 폭력적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이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법이 완벽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형지에서」 속에 장교처럼 법이 완벽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즉 정의가 법과 일치한다는 착각을 갖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기계와 인간 사이 어느 존재가 되어버린다. 기계에 찔려 죽음을 맞은 장교가 기계와 분리되지 않는 장면은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이제 이 논의를 확장하여 시선에 적용하자.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폭력적이다. 본질상 일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선을 통해 대상을 규정하고 그것이 전부라는 착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베르크손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물론 이런 맥락에서 지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실재와 ‘다른’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실재보다 ‘더한’ 것을 보는 것도 아니며 다만 실재보다 ‘덜한’ 것을 본다.
「유형지에서」와 「신임 변호사」는 보이는 것들에 주목하되 그것에 그칠 것인가, 아니면 그 이면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할 것인가의 기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메두사의 눈의 관점에서 다뤄진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유형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보이지 않는 것들, 불가해한 것들에 대해 카프카는 어떻게 말하며 다루고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요 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과 「굴」이라는 작품이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서는 집단 전체와 대조되는 요제피네가 등장한다. 요제피네는 휘파람을 부는데,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휘파람 소리에 매혹된다. 묘한 것은 그녀가 휘파람을 기가 막히게 잘 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 분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구성원들은 그 휘파람 소리에 매혹되어 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요제피네는 자신이 ‘특별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며 구성원들에게 요청하지만 구성원들은 조용히 거절한다.
「굴」에서는 굴을 파고 몸을 숨기는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자신이 만든 굴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정체를 모를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대항하는 화자의 이야기가 작품의 줄거리이다. 이렇게 요약해 놓으니 정말 별 게 없는 것 같다. 짧으니까 꼭 다들 읽어보시길.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요제피네의 휘파람에 대해 많은 토의를 한다. 그러나 무엇도 명확한 답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쩌면, ‘불가해함’, ‘이해할 수 없음’ 자체가 이 상황의 본질인 것은 아닐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 이런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해한 타자가 말을 거는’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막연한 무엇에 끌린다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그것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 말을 거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환대하거나, 혹은 적대하거나.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의 경우에는 환대하는 경우였다. 반면에 「굴」은 적대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이 작품 속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리가 주인공에게 들려온다. 혹은 ‘말을 건다.’ 그리고 이 소리로부터 주인공은 벗어나지 못한다. 이 역시 일종의 ‘매혹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자의 강박은 “사각사각하는 소리”,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불가해한 타자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세계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철저하게 나의 이해에 종속된 세계이다. 작품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확실하고 실제적인 영리함을 최대 장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위인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을 가져다주어 공동체 전체에서 기록할만한 위인은 없었다. 또 과거의 위험이 반복될까 두려워 무언가를 기록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무엇도 특별하지 않고 따라서 아무것도 기록할 필요가 없다. 작품 「굴」의 화자는 완벽히 보호되는 굴을 만든다. 굴 속의 모든 것은 화자의 이해 속에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굴 속에서 몹시 안정감을 느끼고, 굴 외부세계에 대해 배타적이며 두려운 태도를 갖는다. 화자가 상정하는 적이 굴 외부에 있지만, 정작 작품 속에서 화자가 굴 밖으로 나갔을 때 그의 적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단지 화자의 상상 속에서만 있었을 뿐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두 작품은 유사성이 있다. 완벽하게 구축된 나의 세계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불가해한 타자의 현현은 나의 세계, 곧 기지(旣知)를 미지(未知)로 환원한다. 철저하게 이해되고 있던 세계가 한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전복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런 타자에 대응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에서는 환대한다. 작중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요제피네의 목소리를 즐거워하고 감사한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한 지위에 위치하겠다는 요제피네의 요구를 조용히 거절한다. 그녀의 본질은 그녀의 불가해함에서, 모호함과 규정되지 않음 속에서 유래하므로 이들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에 「굴」의 화자는 불가해한 타자를 적대한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의 행동은 크게 세 가지인데, 이는 다른 작품 「변신」에서 주인공 잠자를 대하는 다른 세 가족의 행동과 유사하다. 통제하거나, 멀리하거나, 죽이려 하거나. 「굴」에서 화자는 처음에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 이는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불가해한 타자의 ‘불가해함’을 없애려는 시도이다. 이후에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미로로 도망친다. 이는 멀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일회적인 도피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숨어서 기다리다가 나타나는 순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작품의 마지막까지 성사되지 않는다. 이는 당연하다. 나타나는 순간 근원이 밝혀지며 불가해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리는 소리로서 남아있을 것이며 주인공이 그것에 무신경해질 때까지, 즉 환대하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방금 소개한 카프카의 두 작품들은 보이지 않는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의 양태를 보여주고 있다. 즉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선은 교차한다. 굴의 화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즉, 대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테이레시아스의 맥락 위에 있지만 화자의 태도는 메두사의 그것이다. 나아가 신임 변호사의 주인공 부케팔로스는 보이고 명시적인 법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메두사의 맥락 위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는 규정되는 것 이면의 규정할 수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므로 태도의 측면에서는 테이레시아스의 맥락에 위치한다. 다시 말해, 실제로 다루고 있는 대상이 규정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와 상관없이, 설령 그것이 명백하게 규정되는 것일지라도 오만함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규정되지 않는 부분을 더듬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테이레시아스의 맥락 위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런 맥락 위에서 보자면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과 「신임 변호사」는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으로, 「유형지에서」와 「굴」은 메두사의 맥락에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언급한 카프카의 단편들이 ‘시선’이라는 테마를 소설의 내용으로서 다루었다면, 그에 그치지 않고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활용한 사례도 있다. 나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의 명저 「프랑켄슈타인」을 그 예로 들고자 한다. 이 작품 안에서는 수많은 시선들이 교차한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람의 입으로 말해진다. 처음 시작은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모험가 로버트 월턴의 편지로 시작한다. 어느 날 월턴은 북극에서 한 여행자를 구해주게 된다. 그의 이름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그가 범한 죄, 그리고 그에 따라 치른 대가에 대한 이야기들. 나아가 자신이 완수해야 하는 사명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러나 빅터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죽이지 못하고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후 괴물은 빅터의 시신 앞에서 월터와 재회한다. 그리고 괴물의 입장에서 풀어지는 이야기가 다시 월터의 손을 통해 전해진다. 괴물은 결코, 빅터가 걱정하던 것과 같이 사악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규정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환대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존재였다. 빅터의 시선, 괴물의 시선,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 월터의 시선을 통해 동일한 사건들이 거듭 언급되고 재구성되며, 독자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이때 재구성되는 사건은 바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인 괴물에 대한 것이다. 빅터는 이 괴물을 자신의 업보로, 죄악된 본성을 가진 악한 존재로서 규정하기 때문에 괴물의 인간적 면모로부터 눈을 돌린다. 이는 말하자면, 괴물에 대해 메두사의 시선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괴물과 독대한 월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는 슬프고도 엄숙한 열정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즉, 월터는 직접 괴물과 마주하며 그의 인간적 속성을 느낀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호기심과 동정심 때문이었다. “목이 맨 목소리였어요. 죽어가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괴물을 처치해야겠다는 처음의 생각은 호기심과 동정심이 뒤섞인 심리로 인해 일단 유보하게 되더군요.” 그는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을 제외하면 작품 내에서 괴물과 마주하여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괴물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대화가 일종의 거래였음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인물은 유일할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에서도 괴물을 향하는 두 가지 시선이, 메두사의 눈과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이 교차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룰 작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바로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이다. 작품 내에서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한 인물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이다. 이런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이다. 그녀는 차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속에 응어리져서 언어로 구사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빛을 잃어가는 남자이다. 아주 천천히, 자신의 세계가 어둠 속에 잠식되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 십 대 이후 십여 년을, 허락받은 담배를 되도록 오래 피우려는 사형수처럼. 언어의 상실과 시선의 상실을 겪는 두 사람의 자취가 교묘하게 교차되면서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언어와 시선. 둘은 매우 강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언어는 대상을 규정하고 추상화한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무언가를 개념화하여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와서 무수한 장미를 보고 절망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소년이 절망한 것은 무수히 많은 장미들을 통해 ‘장미’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자신이 사랑하던 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기, 대상을 규정하는 행위는 양날의 검이다. 그것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만 동시에 많은 정보를 놓치게 한다. 이름의 대상이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일 경우 이 괴리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말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흥분한 사람의 말이 두서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감정과 언어 사이 거대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여자는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 상담하는 의사는 유년기의 기억과 꿈, 현재의 상황 등으로부터 문제를 파악하려 한다. 이런 의사에게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니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대상을 섣불리 규정한다는 측면에서는 시각도 언어와 마찬가지다. 시각은 인간의 여러 감각 중 가장 긴 사정거리를 가진다.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의 정보 중 대다수는 우리로부터 멀리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보는 것만으로 대상을 판단한다. 콜라병에 담긴 간장을 실수로 마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첫인상으로 오판하는 일은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이런 성급한 판단은 우리의 일상이 편리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도와주지만, 그만큼 한계 역시 명확하다.
따라서 시각과 언어를 상실한다는 것은 주위에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해야 함을 의미한다. 작품 속에서 여자는 감정을 음미한다.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감정을 감각한다. 열일곱, 처음 언어를 잃었던 순간이 작중에서는 이렇게 묘사된다. “더 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언어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된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 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 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세계 속에서는 논리적 인과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그렇게 단순히 설명될 수 없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가 음미하는 것은 이미지이다. 캄캄한 밤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던 연등회의 이미지, 매일 오후 석양이 비치는 공원의 이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멀어져 버린 첫사랑의 손등 위로 느껴지던 푸른 정맥의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접할 수 없는 이데아. 그의 세계는 썰물처럼 희미해져 갔으므로 뿌옇게 퇴색된 표상들은 상상으로 복원되었다. 나아가 그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은, 적어도 이 세계에는 없다고 말하는 플라톤 철학에 매료되었다. 그가 플라톤에 대해 갖고 있던 가장 큰 문제의식이 결핍의 이데아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데아 곧 완전한 아름다움이 완전한 어둠 속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것이라면, 결국 온전한 어둠으로 침잠할 그의 세계는 버림받은 세계일 테니까.
대상을, 세계를 단순화하고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언어와 시선을 잃고, 그 대가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음미해야만 하는 이들의 모습은 맹인 예언가 테이레시아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세계를 고정시켜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대신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작품 내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플라톤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 자체로서의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틈틈이 저녁마다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 사상에 매료된 유년의 모습은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차용된 상징이리라 생각한다.
독일에서 플라톤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남자는 고국으로 돌아온다.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와 함께. 작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강독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두 번째로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처음 말을 잃었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때 그녀는 학교에서 낯선 프랑스어를 배우며 다시 말문이 트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최대한 낯선 언어를 골라 수업을 듣는다. 여자는 남자의 수업을 듣는다. 전날 미리 외워온 고어를 칠판에 적으며 남자는 두려움을 느낀다. 칠판에 적히는 죽은 문자들의 엄밀한 규칙에서 기묘함을 느낀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둘은 결국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 역시 남자를 모른다. 다만 둘은 함께 있을 뿐이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사실 이런 결말이 당연하다. 작품 속 두 주인공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그렇다. 그러나 애초에 온전한 이해란 없다. 지식은 언제나 고정되는 것들에 대해 성립하니 말이다. 누가 누구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대부분은, 빛과 언어를 잃은 두 사람보다도 서로를 모른다. 상대방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이 가진 빛과 언어로 상대방을 온전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에 상대방을 맞추고 예단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메두사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기 때문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자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남자의 첫사랑 역시 말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심지어 귀까지 들리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남자는 두려워졌다. 여자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데, 나중에 많은 시간이 지나고 세계가 완전히 암흑 속에 빠지고 나면 자신은 여자의 글씨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둘은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어진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부탁한다. 농아학교에서 배운 발성법으로 자신에게 말해주지 않겠냐고. 여자는 불같이 화를 냈고 더 이상 남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주인공은 그날의 일을 회고하며 이렇게 편지를 쓴다.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소설 전체에서 말해지는 것들은 막연한 상징들이다. 명료하게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침묵 같은 것.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가장 이상적인 소설이라 생각한다. 소설은, 문학은 단순한 이야기와도, 보고서나 논문 따위와도 달라야 한다. 소설은 수많은 상징을 내포하여 독자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해야 한다. 지성으로는, 언어로는 감히 담을 수 없는 감정을 감히 번역하여 독자를 흔들어야 한다. 그렇게 독자의 내면에서 다시 탄생하면서도 함부로 이해되지 않아 끊임없이 곱씹혀야 한다. 감히 단언컨대,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들기에 부족한 점은 단지 시간뿐이다.
이상으로 몇 가지 문학작품들을 ‘시선’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시선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나는 메두사의 눈이라 표현한 것으로서, 고정하는 것,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시선이었다. 다른 하나는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이라 표현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서의 운동, 규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리고 여기까지 보건대, 다양한 문학작품에서 메두사의 눈을 폭력의 상징으로서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을 긍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만일, 문학이라는 장르가 계속해서 변하는 시대를 향해 무언가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교만함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모든 미지(味知)를 기지(旣知)로 환원하는 메두사의 오만함에 대항하여, 그 너머의 무엇을 지향하는 테이레시아스의 시선을 갖춰야 한다고 문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은 대학생 연합 문예 창작 동아리 [모두의 일인칭의 시점]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