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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26. 2022

창틀 끝에 네 이름을 올려놓았다.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언젠가 네가 이곳에 오면 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왔었다는 걸 너는 알 수 있을까. 난 손가락으로 얼어붙은 유리창에 점 하나를 찍었다. 그렇게 창틀 끝에 네 이름을 올려놓았다."





꿈은 잠에서 깨면 점점 잊혀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낌만 희미하게 남는 것이다. 삶도 세월이 흐를수록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희미한 느낌만 남는다. 그래서 꿈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는 걸까.


며칠 만에 레이캬비크의 길이 익숙해졌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닫는데 아까부터 따라온 눈이 가방을 든 벨보이처럼 문 밖에 서있었다. 붙이지 않은 편지를 뒷골목에 버리고 오는 걸 들킨 걸까. 미행하듯 따라온 눈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돌아서서 테이블에 지갑을 던지면서 이제 남은 돈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다지 초조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자동차라면 기름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멈추겠지만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대부분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걸 선택한다. 종종 그 자리에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거의 매번 최악의 조건에서 떠났다. 지금 떠나야 한다고 느낄 때는 언제나 여비가 없거나 시간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떠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부러워한다. 그건 여행을 간다는 사실 자체를 부러워하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현재의 조건, 즉, 돈과 시간, 여유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우울하고, 언제나 바빠서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들이 지금 떠나야 한다는 마음보다 중요할까. 어떻게든 떠날 때도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서 교도소를 탈출하는 마음처럼 간절하다면.


아이슬란드에서의 생활이 며칠 되지 않았지만 이미 생활의 루틴이 생기고 있었다. 극야의 아이슬란드는 해가 떠있는 낮이 몇 시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늦게 뜨더라도 해뜨기 전의 여명이 있고 늦게 지더라도 해가 지고 난 후의 잔영이 있다. 해뜨기 전의 짙은 푸름과 해가 진 후의 눈물 같은 붉음을 나는 사랑한다.

그날도 나는 해가 질 무렵 레이캬비크를 천천히 걸었다. 영업시간을 놓치기 전에 사놓은 위스키 한 병 때문에 가방이 묵직했다.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어떤 불 꺼진 집의 창이 보였다. 무거운 커튼 사이로 잡초 같은 성에가 자라고 있었다. 차가운 성에 위에 호를 그어 보았다. 그리고 원을 그린다. 수직선을 그리고 수평선도 그린다. 너와 함께 걷던 길과, 너의 집으로 가는 길과, 아득히 사라지던 서쪽 하늘.


모퉁이 선물 가게 쇼윈도에 예쁜 장식전구가 걸려 있었다. 잠시 멈춰서 작고 예쁜 것들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선물 상자 위에서 앙증맞은 리본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해 너의 생일이 떠올랐다. 내리던 눈이

공중에서 얼어붙던 밤이었다. 난 선물 살 돈이 없어 시를 썼다. 시를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예쁜 물건을 대신해서 시를 쓰고 있는 내가 창피했다. 집에는 포장지도 없었지만 다행히 안 쓰는 액자가 있었다. 시를 쓴 종이를 액자에 끼워 넣고 신문지로 포장했다. 그날 밤 너에게 가는 국도는 유난히 길었다. 너의 파티에서 많은 친구들이 너에게 반짝이는 선물을 건네고 있었다. 난 부끄러운 손짓과 눈빛을 술잔 속에 감추고 신문지 뭉치를 너에게 주었다. 그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신문지 선물을 고대 유물 보듯 쳐다보았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액자 속의 시를 보고 너와 너의 친구들은 감동했지만, 그것이 진짜 감동이었을까. 잠시 조용해졌던 식탁에는 다시 다른 선물들이 올라왔고 모두들 다시 즐겁게 웃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즐거운 웃음소리지만 겨울바람처럼 옷깃을 파고들었고, 입을 다문 나의 말들은 미아처럼 의자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날 밤 네가 내게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해가 갈수록 잊고 싶은 추억은 하나도 없는데 지워지는 기억만 하나 둘 늘어나는 걸까.


다음 날 밤, 오로라를 보러 가는 버스 안에서 오로라 가이드가 아이슬란드의 전설을 얘기해주었다.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차내의 모든 전등을 소등했고, 컴컴한 차 안에서 나는 가이드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가이드는 아이슬란드 전통 민요 하나를 들려주겠다면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처음 듣는 멜로디를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신비한 주문처럼 느껴졌다. 왠지 지금 차창 밖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비한 경험은 언제나 시간의 감각을 뒤틀어 놓는다. 다음 날 아침, 숙소의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들어 바닥에 조금 남은 위스키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 컵 자국이 남아 있었다. 문득 너에게 나는 얼마나 지워졌을까 생각했다. 물방울이 증발해도 흔적이 남는데 어떤 기억이 흔적마저 사라질 수 있는 걸까.

노트북 화면에 항공권을 검색하던 페이지가 떠있었다. 여행은 나를 회복시킨다. 도시에서 받은 상실, 관계에서 생긴 상실을 말없이 어루만져준다. 그렇다고 새로운 관계나 내가 돌봐야 할 다른 무엇을 만들어 다시 채워주는 건 아니다. 그냥 조용히 오직 나 자신을 말없이 안아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난 희미해졌다는 건 아직은 흔적이 보이는 것이니 그보다는 완전히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한 욕심 아닐까. 눈처럼 세상에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삶이라면, 이 푸른 겨울밤에 달빛 같은 흔적 정도는 남겨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남은 생 안달하지 않고 살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며칠 후, 다시 그 빈 집을 찾아갔다. 바람이 불고 지붕에 쌓였던 눈이 쓰러지듯 떨어졌다. 빈 집의 불 꺼진 창이 텅 빈 스케이트장처럼 웅웅 울고 있었다. 그 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려다 다시 돌아서서 그 집의 불 꺼진 창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네가 이곳에 오면 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왔었다는 걸 너는 알 수 있을까. 난 손가락으로 얼어붙은 유리창에 점 하나를 찍었다. 그렇게 창틀 끝에 네 이름을 올려놓았다. 길 위에는 눈에 스민 달빛과 달에 빠진 별빛과 다시는 네게로 돌아가지 않을 긴 발자국만 남은 밤이었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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