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서 May 12. 2022

오후의 지우개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여행은 슬픔을 외면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아무도 없는 강가에서 와인을 병나발 불어도 더 이상 슬프거나 아프지 않고, 쓸쓸함을 친구처럼 옆에 앉힐 수 있는 것이다."




오후의 공기가 지우개로 여기저기 지운 메모지 같았다. 오래된 기억처럼 바스락 거리는 오후 한 장이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있다. 그때가 몇 번 째였는지, 몇 월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그다드 카페의 삽입곡 콜링 유를 듣고 있었고 그 음악처럼 노랗고 건조했던 그곳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프랑스행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도 오래전에 같은 잡지에 글을 연재하던 필자분을 만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가야 했지만 그분은 내게 아직 가보지 못했다면 아를을 가보라고 추천해주었다. 마침 나는 남프랑스로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분 말대로 아를에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남들처럼 아를이라고 하면 고흐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그곳의 사진학교에 한국인들이 자주 유학하러 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를에 있는 한 호텔에 예약을 했다. 고성 같은 건물에 작은 수영장이 뒤뜰에 있는 예쁜 호텔이었다. 오후에 도착하는 나는 일단 체크인을 하고 바로 나와서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러다 그 유명한 밤의 카페 테라스에도 들려서 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을까.


 아를은 꼬뜨 다쥐르에 있는 다른 도시와는 분명 다른 분위기다. 내가 갔던 다른 도시들은 거의 다 바닷가에 있었지만 아를은 바다 대신 강이 흐르는 내륙 도시다. 그렇기 때문에 아를의 날씨는 다른 도시들과 완전히 달랐다. 건조하고 따뜻했고 무엇보다 햇살의 색이 달랐다. 노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햇살이 오래된 도시의 구석구석에 걸려있었다. 난 중심에서 바깥으로, 골목에서 점점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느 도시든 뒷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지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길에 남은 발자국만 발에 밟히기 마련이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감촉이 오래전 타르 사막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각거리는 모래 소리와 은은한 온기가 날 상념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자주 멈춰 서서 고요한 뒷골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 밑의 건조한 모래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 같았다.


 어디로 향해 가는지 모른  그저 흐르는 대로 걷다 보니 다시 번화가로 나왔다. 꿈속을 걷다가 잠에서  기분이었다. 익숙한 노란 어닝이 눈앞에 보였다. 고흐가 그린 바로  밤의 카페가 눈앞에 있었다.  좋게 내가 앉은자리가 고흐의 그림의 구도대로 바로 보는 자리였다. 아마도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바닥을 고흐도 밟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곧, 단체 관광객들의 대화 소리가 체육관의 농구공 소리처럼 웅웅 울렸다. 남은 커피를 한입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꾸만 아까 걷던 골목이 생각났다. 나는 사진을 찍고 환하게 웃는 관광객들을 유령처럼 지나쳐 빠져나왔다.

 언젠가부터 나는 별로 웃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코트처럼 무거운 쓸쓸함을 입고 다닌 것이. 가게에서 싸구려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샀다. 강가로 가고 싶었다. 강은 멀지 않았고 그 유명한 론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난 강가의 석조 구조물에 걸터앉아 와인을 마셨다. 투명한 황금빛 액체가 병 안에서 흔들거렸다. 노란 수액이 담긴 링거병 같았다. 이곳의 뒷골목처럼 건조하고 적막했던 병원 복도가 생각났다. 익숙한 링거, 익숙한 차트, 익숙한 발자국 소리가 신기루처럼 론강 위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하지만, 슬픈 감정으로 떠난 길이라면 여행을 한다고 무조건 즐거워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행은 슬픔을 외면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아무도 없는 강가에서 와인을 병나발 불어도 더 이상 슬프거나 아프지 않고, 쓸쓸함을 친구처럼 옆에 앉힐 수 있는 것이다.


 그날 오후 호텔방 밖에서 누군가 마당 쓰는 소리가 났다. 창밖을 보니 황금모래 같은 햇빛을 바람이 쓸고 있었다. 벽을 덮고 있던 햇살이 지우개로 지우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방문 밑으로 넣어둔 저녁 메뉴 종이가 처방전처럼 보였다. 모르는 도시, 모르는 꽃나무 아래에서 나비처럼 조용히 하루를 견디면 내일부턴 조금씩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 글, 사진 희서

작가의 이전글 낡은 가구 같은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