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4년차. 오늘은 4년차 예비군 훈련의 셋째 날이었다. 예비군 훈련 기간이 돌아오자 새삼 깨달았다. 4km 앞 이북의 숲이 보이던, 송아지를 끌고 강아지를 쫓고 동료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북한 군인이 보이던 파주 문산을 떠난지도 4년이 흘렀구나.
내가 군생활을 했던 곳은 중부전선의 최전방이었다. 파주 문산 송악산. 미군 군용트럭들과 함께 파주 통일대교를 건너 몇 키로 정도 들어가면 송악산이 나온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평탄한 봉우리가 나오는데, 그 옆에 철망으로 둘러싸인 작은 소초가 나의 거처였다. 컨테이너 박스 두세개를 이어붙인 크기. 그곳에서 스무명 남짓의 군인이 생활했다.
나는 그곳에서 4.2인치 박격포를 다뤘다. 우리의 임무는 최전방 부대를 위한 화력 지원이었다. 전방지대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전투 현장에 박격포를 발사해야만 했다. 딱 10분. 그곳의 생명은 그로부터 딱 10분 주어진다고 소대장은 말했다. 속도는 생명보다 중했고 그 속도를 위해 생명을 내걸어야 했다. 피아를 구분하기엔 너무도 촉박했다.
한번은 부대 위에 있는 전망대를 청소하러 간 적 있었다. 종종 교회 팻말을 꽂은 차량이 산을 타고 우리 부대로 들어오곤 했는데, 아마 그 전망대에서 단체 예배를 드리는 듯했다. 예배 행사가 있기 전, 소대장은 나를 포함한 몇몇 병사에게 전망대 청소를 명령했다. 빗자루와 쓰레받이, 각종 청소도구를 챙겨 전망대로 올라갔다. 계단을 가린 소나무 잎이 발에 채였다. 내가 머무는 곳이 그토록 높은 꼭대기라는 걸 전망대에 오르고 나서야 실감했다.
전망대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탁 트인 평원이 나를 압도했다. 푸른 풀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높은 전망대 아래서 본 세상은 납작하고 넓었다. 흩어진 나무들은 새순처럼 작게 보였다. 평원에 찾아온 바람이 수풀을 쓰다듬었다. 고라니로 보이는 작은 점들은 꾸물거렸다. 그래, 여기가 비무장지대리라. 이 너른 땅 밑에는 사람의 발목을 끊을 지뢰가 박혀 있으리라. 고요했으나 생동했다. 기이했으나 장엄했다. 빗자루를 든 일병은 숨을 멈췄다.
그곳에서 지내며 매달 누군가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어느날은 근처 소초에서 젊은 소대장이 자살을 했다고. 또 어느날은 도박에 중독된 부사관 하나가 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웠다고. 그리고 또 어느날은 지뢰 훈련 후 마저 제거되지 않은 지뢰가 폭발해 장교 한 명이 죽고 병사 한 명이 크게 다쳤다고.
누군가 죽었다는 말을 난 믿기 힘들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군인이 자꾸 죽었다. 결원은 늘어났다. 소대장이 설파한 최후의 10분에 여러 차례 압도됐으나, 죽음이란 실은 거창하지 않았다. 죽음은 도처에 있었고, 사인은 참으로 다양했으며 그것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들 하나의 죽음은 한 사람의 상실이었다. 그 사람은 더는 말을 할 수도 꿈을 꿀 수도 없었다. 문산 송악산에서 누구도 죽지 않기를 수도 없이 바랐다.
유난히도 뜨거운 9월. 다시 꺼낸 군복에서 문산의 기억이 아로새긴 군의 씨를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