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2박 3일간 이어진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어제저녁 집으로 돌아왔다.올해 초 가족여행 후 9개월 만에 찾은 제주였다. 이틀밤을중문해안 인근의 숙소에서 묵었다. 제주에 자주 가보진 못했으나, 그중에서도 중문해안은 처음이었다. 이전에 방문했던 협재, 한림, 금능해안과 달리 중문은 인적이 드물었다. 사람보다 밀감나무가 많았고, 간간이 꽤나 부유해 보이는 이의 집과 이국적일정도로 이질적인 럭셔리 카페가 보였다. 풀이 엉성하게 자란 갓길에서는 주름 그득한 할머니가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소리치며 귤이 가득 든 망을 흔들었다. 나는 토요일 아침 직장 상사들과 중문해안을 한참 걸었다. 호텔 조식을 무리하게 세 접시나 먹은 뒤였다.
주상절리대 중문
절리(節理)란 지층이나 암석이 쪼개지거나 갈라져 있는 것을 말한다. 화산암에는 주상절리와 판상절리가 발달된다.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형성되는 기둥 모양의 절리로서 고온의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는 과정에서 수축작용에 의해 생겨난 '틈'이다. 특히 이곳 절리대는 최대 높이 약 25m에 달하는 수많은 기둥 모양의 암석이 중문 해안선을 따라 약 2㎞에 규칙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마치 신이 빚어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약 14만 년~25만 년 전에 형성된 조현현무암으로 이루어져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ㆍ보존되고 있다.
중문해안을 산성처럼 에워싼 주상절리대를 걷던 중 주상절리에 대한 셜명문을 볼 수 있었다. 관광지 설명문 치고는 쉽고 탁월한 글이라 생각했다. 이 글로 단번에 알았다. 주상절리는 고온의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는 과정에서 수축에 의해 생겨난 '틈'. 그러니까 식어버린 용암이 남긴 기둥 모양의 틈이 바로 '주상절리'인 것이다. 십수만년 전, 이곳에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을 만치 뜨거운 용암이 치솟고 흘러내리기를 반복했으며, 이윽고 그 용암이 빠르게 식어감에 따라 수직으로 길다란 틈이 발생했다. 넘쳐나는 용암의 양만큼 틈은 그 결을 따라 벌어졌다, 닫혔다, 굳어갔다. 그리고 다시 십수만년 후 한 미물이 그 위를 걷는다.
목, 금 지난 이틀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던 터라, 썰렁한 중문해안이 퍽 마음에 들었다. 종일 카메라와 짐을 이고 있던 목과 어깨가 천근만근이었지만, 어쩐지 걸음은 가벼웠다. 걷는 내내 한 귀로 대표님과 차장님이 주고받는 대한민국 언론사를 들으며 다른 한 귀로는 중문의 소리를 들었다. 솨 파도가 용암의 틈과 부딪치는 소리, 바람이 밀감나무를 흔드는 소리, 욕인지 인삿말인지 알 수 없는 노파의 방언, 풀숲을 지나는 발걸음들이 내는 소근거림들.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카페의 전자음악까지. 채 해석하지 못한 여러 소리들이 한 데 엉켜져 나를 통과했다. 용암을 품에 안은 섬이 내는 소리였다.
문득 목요일 밤 행사 축사를 하며 진도를 지원해달라고 외치던 진도군 공무원 A가 떠올랐다(구체적인 직급은 밝히지 않겠다). 그가 말한 진도와 제주도의 인연은 깊고 아팠다. 13세기 고려 대몽항쟁 최후의 보루였던 삼별초는 진도에 진영을 마련해 몽골에 저항했다. 그러나 고려ㆍ몽골 연합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전세는 기울었고, 지휘관 김통정과 패잔병들은 제주도로 후퇴했다. 뒤집힌 전세는 회복되지 못했다. 포위된 삼별초의 기세와 규모는 날로 줄어들었다. 70여 명의 수하와 한라산으로 몸을 피한 김통정은 어느 밤 목을 메 자결했다. 고려의 대몽항쟁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삼별초 이야기에 뒤이어 A는 10년 전 고등학생 300여 명을 태운 여객선이 진도 팽목항에서 제주도로 향했다고 말했다. 4월 중순, 무르익은 봄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여행길의 아침, 배는 삽시간에 기울어졌고 거기에 타 있던 수백여 명이 익사했다. 그 중 대부분은 18살 소년소녀였다. 몇 시간 만에 수면 아래로 잠겨 들어가는 세월호 위로 헬기 여러 대가 떠다녔다. 내가 17살이었을 적 일이다.
700여 년 전 산속에서 죽어간 이들과, 10년 전 바닷속으로 사라진 젊음들에 가슴 한 쪽이 시큰했다. 그리고 나는 25만년 전 굳어진 틈 위를 서성인다. 만 보 넘게 걸었던 듯 싶다. 다리가 아픈 줄은 몰랐다. 다만 억겁의 시간이 주는 허무와 초연함에서도 상실이 남긴 빈터는 쉽사리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내가 이 세대의 구성원인 한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었다.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도 그 흔적을 곱씹고 곱씹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