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향수를 자아내는 공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내겐 유년 시절을 보낸 송담리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송담리 작은 동네, 푸른 슬레이트 기와가 올려진 단독주택에 살았다. 밤에 들으면 오싹할 법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군데군데 녹이 슨 철제 현관문. 푸른 잔디가 일정치 않게 자란 정사각형 마당. 마당의 양 끝에 개집이 하나씩 있었다.
오른편 집엔 ‘백구’라는 이름의 진돗개가, 왼편엔 일명 ‘시고르잡종’ ‘검둥이’가 지냈다. 백구는 힘이 셌다. 손바닥만 하던 녀석이 어느새 마당 한구석을 채울 만큼 우람해졌다. 종종 목줄을 기둥 채 뽑고 마을을 활보했다. 백구는 자유로웠고 우리 가족은 몇 번이고 기둥을 다시 박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검둥이는 늘 차분했다. 윤기 나는 검은 털 사이의 촉촉한 검은 눈, 언뜻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검둥이는 옆집 치와와와 사랑을 나누었고,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검둥이는 가장이 된 이후로 어금니를 드러낼 줄 알았다.
우리집에는 옥상이 있었다. 거기서 빨래를 널었다. 어느 아침에는 북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장선에서 장군에 명에 따라 북을 울리는 병사가 등장하는 사극을 본 직후였다. 옥상에서 북을 두드렸다. 마을 이웃들의 잠을 내가 깨우고 싶었다. 가는 팔로 열심히 두드렸다. 북소리는 드라마만큼 웅장하지 않았고 금세 싫증 난 나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송담리에는 우리집을 닮은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 사이로 난 골목길들은 내 놀이터였다. 동생을 데리고 골목을 쏘다녔다. 장난감 칼을 들고 있거나, 발로 공을 굴리면서. 아이가 많지 않은 동네였다. 동네의 유일한 친구는 건너편 골목의 형제였다. 형은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고, 동생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둘 다 까무잡잡했다. 우리 형제와 그 형제는 서로의 집과 동네 곳곳을 오가며 놀았다. 동네 뒤편 공터에서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동네를 벗어나 미로 같은 논밭에서 밤을 기다리는 게 우리의 유일한 일탈이었다. 형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내가 본 이후로 자기 만화책에 흠집이 생겼으니 몇백 원을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나는 대체로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그 형도 금세 시큰둥해져서 관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모여 땀을 흘리면서 놀았다.
송담리에서 햇수로 채 3년을 살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통학 문제로 아파트 단지로 이사 가야만 했다. 송담리를 떠나기 싫었다. 어느새 7마리로 불어난 강아지 가족들을 보내며 많이 울었다. 이사 간 이후 까무잡잡한 형제를 다시 보지 못했다.
송담리에서의 모든 기억은 그 공간에 고스란히 굳어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몇 번 이사를 다녔고, 그보다 몇 번 송담리를 추억했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백구와 검둥이를 생각한다. 양옆으로 찢어진 형의 눈을 생각한다. 어쩌면 다행이다. 그런 기억들이 퍼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어서. 추억들을 찾기 위해 기억의 지도를 방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늘 그곳에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