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게시물로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마냥 블로그에서 늘어놓는 횡설수설을 쓸 수는 없는 노릇. 고민 끝에, 우선 자기소개를 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지난날 해온 자기소개의 역사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나를 소개했던 순간들을 모아놓으면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나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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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눈물을 터트리는 아이에게 자기소개는 너무 가혹했다. 나이와 이름을 밝히는 게 전부인 간단명료한 7살들의 자기소개. 그마저도 겁이 나 고개를 숙인 채 양말 속에서 꿈틀거리는 발가락을 보았다. 내 머리와 내 신체의 부분들이 분리된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다. 손은 손이 하고 싶은 걸 했고, 발은 발이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내 머리는 지휘와 통제의 감각을 잃은 채 뿌연 시야에서 허우적댔다. 선생님이 등을 쓸어주며 나를 대신해 줄 때, 그제야 호흡을 내쉬었다. 이름을 말했다. ‘석영’이 친구들에게 ‘서경’과 ‘성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7살의 자기소개는 오랜 예열이 무색하게 신속하게 마무리되었다. 다시 와선 안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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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면서 꽤 자유분방해졌다. 속은 여전히 여려서 툭하면 가슴이 시큰거리고 코끝이 찡해졌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때쯤부터 나서기를 좋아했다. 내게 향한 시선들이 부끄러우면서도 말 한마디마다 요란하게 반응하는 초등학생들의 리액션에 목덜미 찌릿한 쾌감을 느꼈다. 자기소개에는 퍼포먼스가 곁들여졌다. 선생님을 제외한 반의 모두가 웃을 법한 개그라던가(대개 굉장히 저질스럽거나, 어처구니없는), 교단이나 혹은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슬랩스틱을 선보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적절한 순간에 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게 자빠지는 요령이 그즈음 내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정신없는 입장 때문에 이후의 자기소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나는 반에서 엉뚱하고 웃기고 조금은 허술한 아이로 통했다. 내가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왜일까,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웃겼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것만 같았다. 껍데기가 산만할수록 속은 시들었다. 13살 꼬마가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지만 나는 나를 표현하는데 서툰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때 그렇게 까분 것은 분명하지 않은 내 존재를 그런 식으로나마 규정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몰랐다. 내가 나를 모르는 만큼 쉽게 나를 단정 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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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가면을 쓰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엉뚱하고 웃긴 고등학생은 진지한 이야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얼핏 느껴지는 내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끼리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두근거렸다. 마음속에 눅진한 덩어리들이 엉겨 붙었다. 덩달아 입이 무거워졌다. 내 언어는 부실했고 자주 끊겼다. 이런저런 핑계로 주저하며 나를 숨길수록 친구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때의 난 나를 소개할 줄 몰랐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혼자 남겨졌을 때의 온도 차가 더 극명해졌다. 그럴수록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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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했다. 군대라는 환경은 말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운 곳이었다. 두셋만 모여도 욕설과 음담패설이 난무했다. 뒷담화는 동네 탁구장의 탁구공처럼 여기저기서 빠르게 오갔고, 금세 휘발되었다가 만사가 지루해질 즈음 다시 등장했다. 군대에서 나를 소개하기란 꽤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편집해야 했다. 적어도 뒷담화에 오르지 않을 만한 사람은 되어야 했다. 물론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부대가 잠든 밤이면 나는 ‘나’를 생각했다. 조직에 위화감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스며들 수 있는 나로 천천히 조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 동안 나는 나와 가까워졌다. 나를 서툴게 되뇌며 조금씩 내가 편해졌고 익숙해졌다. 어딘가 뻔한 구석이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다지 복잡하거나 음침한 편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거칠고 투박한 그 세계에 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이루는 언어들은 점차 풍성하고 단단해졌다. 어느샌가 마음속 덩어리들이 녹아 배출된 것만 같았다. 아주 강한 상대를 이겨낸 듯한 통쾌함, 나는 비로소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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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나를 모른다. 조금은 노련하고 능숙한 척하지만 내 자기소개가 얼마나 어눌한지 잘 안다. 여태껏 개척한 영역들만을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개척해 가야 할 미지의 영역, 신대륙을 마주하기 두렵다. 그렇지만 또한 안다. 하나의 단어로 하나의 색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총천연색을 품고 복잡하고 정밀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마음의 메커니즘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나를 더욱 열심히 소개하려 한다. 비록 내가 나를 다 모르더라도, 평생 완전함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를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공들여 이어가는 내 소개가 상대의 진심 어린 소개로 이어지길 바란다. 무턱대고 서로를 주고받는 대화가 끊이지 않는 풍경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