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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14. 2024

내일은 더 괜찮겠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있다. 대부분 힘든 꿈이나 슬픈 꿈을 꾸다가 깰 때 그렇다. 오늘도 꿈을 꾸다 번쩍 눈을 떴는데, 그때부터 두통이 심해져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서야 누그러졌다. 다시 누워도 잠은 올 것 같지 않아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나 버렸다. 


허리가 좋지 않아 열흘 정도 산책을 쉬었는데,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몸이 보챈다. 그래서 오늘은 살살 나가서 한 시간쯤 천천히 걸었다. 요즘 때아닌 비가 자주 와서 날씨가 맵싹하더니 오늘은 바람도 없고 볕도 따숩다.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은 벌써부터 듣고 있었지만 오늘 처음 만났 내딛는 발끝마다 유채꽃들이 불쑥불쑥 올라와 있다. 세상이 파스텔색으로 뒤덮이겠지 싶어 겨우내  잠겨있었던 마음의 빗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 그리고 지난 산책에서 자주 만났던 새들이 떠난 쓸쓸한 자리를 봄꽃들이 대신해 줄거란 생각에 기분도 한결 화사해진다.


오늘 만난 매화. 유채, 산수유


날씨 탓인지 없던 식욕이 생긴다. 점심을 먹기 위해 동생을 불러 옛날에 아버지와 자주 갔던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에 있는 만둣집으로 갔다. 허름했던 집으로 기억하는데 무슨 방송에 나왔다더니 꽤 번듯해져 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만두와 따뜻한 중국식 콩국을 시켰다. 아버지는 이 심심한 콩국에 튀긴 밀가루 빵을 적셔 먹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콩국은 내 입맛엔 심심 밍밍했다. 그런데 동생은 담백하고 맛있단다. 나보다 동생이 더 어른인 걸까? 내게만 있는 기억인 줄 알았는데 동생도 기억하고 있었다. 뭉클해졌다.


아버지는 이 밍밍하고 심심한 콩국이 맛있어지면 어른이라고 했는데 ...


그 옛날, 아버지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저녁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 아버지가 술 한잔하고 늦게 귀가하는 날엔 항상 맛있는 것을 안고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혹여 식을까 봐 만두가 든 봉지를 점퍼 속에 넣어 오시던 기억 속의 아버지를 오늘 만났는데, 왜 그때의 모습에서 멈춰 있는지. 오늘 아침, 아버지 꿈을 꾸다 깼다. 꿈속에서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인지하자, 너무 슬퍼져 눈이 떠졌다.


지난겨울은 유독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흘려버렸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했던 많은 이별들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에게 버림받고 허청허청 다른 곳으로 떠난 사람보다, 자연의 운명으로 홀연 떠난 사람보다, 혼자 남겨진 나를 더 연민한 시간이었던 것은 아닌지. 차례대로 꿈속에 찾아오는 것을 보면 아마 그랬던 것 같아 떠난 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무조건 잊는 것이 상책이 아니듯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산다는 것 또한 행복한 것 아니다. 이제 바뀌는 계절의 색깔에 맞춰 겨우내 껴안고 있던 회색 보퉁이를 내려놓아야겠다. 그리고 두어 발자국쯤 걸어 나와야겠다. 


오늘 산책에서 만난 새봄과 그리운 아버지와의 추억 한 자락 때문에 주름졌던 기분이 조금 펴지는 것 같다. 내일은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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