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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솜 Oct 08. 2024

영혼의 무풍 상태

A세대가 되고 싶어

휴직을 하고 나니 남들 출근하는 이른 오전부터 3월의 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될 때까지 계절의 변화를 업무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몸으로, 내 감정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여유롭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어 휴직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던 나의 10대, 20대, 30대가 이제야 비로소 조금은 완성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40대에 접어들자마자 휴직도 할 수 있었다며 과거의 나에게 칭찬도 해주었다.


시간이 많으니 TV도 자주 보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인데, 최근 기안84님이 가수라는 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 여행하는 에피소드가 방영됐다. 그러고 보니 기안84님은 여행 중 새로운 사람을 사귈 때마다 꿈이 뭔지 물었다. 결혼하고 엄마가 된 이후로 나에게 꿈이 있었을까?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 그게 유일한 꿈이라면 꿈이었겠다. 되돌아보니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소망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나의 어릴 적 꿈은 ‘작가’였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머릿속에 워낙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랄까?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적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 브런치도 하게 되었고, 또 그러다 블로그도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좋아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좋아하는 것에서 그치지 못하고 성과를 내고 싶어 한다. 늘 목표를 향해 달려왔고, 직장에서도 결과물을 내오던 이 습관이 참 무서운 것 같다. 재미 삼아 시작한 블로그에 집착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정보 공유나 글을 쓰는 공간이 아닌 조회 수를 살피게 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검색하게 할까 생각하고 찾아보고... 하루라도 포스팅을 하지 않으면 숙제를 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강박증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블로그를 하지 않는 날을 보내보기로 혼자 마음먹었다.


아침을 커피로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늘 카페에 갈 때마다 블로그 전용 휴대폰을 들고 갔다. 오늘은 블로그를 하지 않는 날을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과감히 집에 두고 나갔고, 대신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들고나갔다. 요즘 ‘마흔에 읽는 니체’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쇼펜하우어랑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마흔에 읽는 니체’를 읽으며 고개도 끄덕이고 공감되는 부분에는 체크도 하고, 메모까지 하면서 오랜만에 책에 집중했더니 머릿속이 개운하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이 권태기였다. 처음에는 날이 선선해지니 가을을 타나보다 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이 길이 맞는 걸까,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되나, 여러 가지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니 정답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권태기가 온 것이다. 이게 바로 ‘니힐리즘’이었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목표가 결여되어 있는 것, 무엇 때문에가 빠져있는 상태. 내가 지금 그렇다. 아무래도 일을 쉬고 있어서, 시간이 많아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출장과 업무에 시달려 지냈던 작년에도 이런 권태기가 찾아왔었다. 권태기가 찾아온 와중에 업무와 집안일에 치여 정신없이 보내니 내가 왜 이걸 이렇게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봉착했고, 결국 답을 내리지 못하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아내이고 엄마이다 보니 이러한 나의 감정을 시시콜콜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다. 부정적인 감정을 나누면 다 같이 힘들어지기 시작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브런치이다.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쓰다 보면 나를 되돌아볼 수 있을 것 같고, 나를 이해할 수 있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쓰는 이 글도 발행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보는지, 얼마나 공감하는지 알게 되니 결국 집착하게 될 것이고 보여지는 글을 쓰게 돼서 솔직함이 점점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솔직하는 쓴 글들을 비공개로 하지 않고 발행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공감하고 위로받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도 누군가의 글을 보며 공감하고 위로받고 또 용기를 내기 때문에.


니체의 말을 빌어, 권태기는 위기가 아니라 전환기이다.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동력을 얻는 때이다. 영혼의 무풍 상태. 나는 이 순간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나씩 하면서 배우고 익히는 시간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A세대. Ageless(늙지 않는), Accomplished(성취한), Alive(생동감 있는), Attractive in my own way(나의 방식대로 매력 있게), Admired(존경을 받는), Advanced(진보한) 삶을 사는 45~60대. 나는 나의 권태기를 A세대가 되기 위한 무풍 상태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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