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바다1

음악에 떠오른 이야기

by 리을

https://youtu.be/OUgryx__lcE?si=gytz8LvGbV3Bo14J



어둠이 드리워진 작은 방안, 꼭 여미지 못한 커튼 사이로 햇빛 한줄기가 떨어졌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얹혀진 작은 인형들을 차례차례 비추던 빛은 침대 위, 잠들어 있던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까무잡잡한 발목, 새근거리며 고른 숨을 내뱉고 있던 얼굴까지.

벌떡- 빛이 소녀의 얼굴이 닿은지 얼마나 지나서였을까. 얼굴에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뜬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급해 보일정도로 급하게 일어난 소녀는 망설임 없이 커튼을 걷어냈다. 눈부신 햇살에 잠시 눈을 찌푸리던 소녀의 눈은 금새 커졌고, 설렘에 입술을 깨물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침이 왔다.

허리께까지 오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 그보다 짙은 까만색의 커다란 눈 위로 동그랗고 반질한 이마에는 여드름 자국이 보였다. 잠시 멍하니 맑은 하늘을 바라보던 소녀는 긴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옷을 벗어던지고 어젯밤 미리 준비해뒀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대충 눈꼽만 떼어내곤 배낭 하나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바로 밑에는 아늑한 주방이 펼쳐졌다. 여러 사람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 위에는 김이 폴폴 나는 빵이 올려져 있었다. 소녀는 빵을 입에 물고 좀 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수납장을 열며 이곳저곳을 살피던 소녀가 자그마한 물병에 물을 담았다.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냄비에 건더기가 가득 담긴 스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참지 못하고 국자에 손을 뻗었다. 냄새만큼 고소한 감자 스프는 소녀가 익숙히 알고 있던 맛이었다. 그 포근한 느낌에 다시 한 국자를 더 퍼올렸다.

"김윤하! 누가 그런 자세로, 국자로 먹어도 된다고 했지?"

손에는 한 입 베어문 빵과 작은 물병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옷차림을 하곤 다른 한 손으로 국자를 들고 있던 소녀이 등이 움찔거렸다.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저 나가는 중인데, 감자 스프가 잠시 붙잡았다구요."

한 마디 내뱉으며 소녀의 어정쩡한 자세로 마저 스프를 먹는 모습에 할머니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제대로 앉아서 먹고 가."

"안돼요! 지금도 늦었다고요."

싱크대에 다가가 국자를 헹구더니, 손에 있던 빵을 다시 입에 물었다.

"하하- 아유, 누가 너를 말리겠니. 햇빛 따가우니까 잘챙겨가고, 너무 멀리 가지말고, 있다가-"

"네,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쉴새없이 움직이는 입만큼 바쁜 걸음걸이로 스쳐지났다. 밖으로 뛰쳐 나가려던 소녀가 다시 뒤를 돌아 헐머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뺨에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따뜻한 아이보리색 페인트에 주황색 작은 기와를 얹은 2층집. 잔디가 깔린 갖가지 꽃이 피어있고, 커다란 나무 몇 그루도 심겨있다. 짙은 녹색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열 네살의 소녀, 김윤하가 나왔다. 윤하는 고개를 들어 시릴만큼 파란 하늘에 잠시 눈을 맞추더니 다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 뒤편의 작은 창고에서 파란 파라솔 하나를 어깨에 둘러맸다. 그리고는 창고 옆에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차는 다닐 수 없는 작은 오솔길은 곧 나무가 우거진 숲을 향해 뻗어있었다.

소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늘만큼 시원한 공기가 거침없이 가슴까지 들어왔다. 그 숨의 끝에는 소녀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냄새가 섞여있었다. 눈을 감고도 달릴 수 있을정도로 익숙한 곳.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올려다보기 힘들정도로 키가 컸던 나무들이 그리 커다랗게 느껴지지 않았다. 꼬마 윤하가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이곳을 걸을 때면 소녀는 언제나 다시 꼬마가 되는 것만 같았다. 종종 걸음으로 모든 걸 신기하게 바라봤던 작은 꼬마가.


눈을 감고 천천히 숲을 걷던 소녀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달릴 수 있을정도로 익숙한 길이었다. 이곳은 언제나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정신없이 숲을 가르며 달리던 소녀의 얼굴에는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설렘에 자꾸 번지는 미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남지 않았어! 곧, 곧이야!'

희미하던 냄새는 점점 더 짙어졌고 뺨을 스치는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소녀는 점점 더 빠르게 달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숲의 끝이 보였다.


숲의 끝에 다다른 소녀는 어깨에 매고 있던 파라솔과 가방을 바닥에 팽개쳤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과 함께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풍덩-

앞뒤로 세차게 흔들었던 팔에도, 바닥을 힘껏 박차고 움직이던 다리에도 힘이 빠져나갔가. 아니 긴장하고 있던 온몸 구석구석이 숨을 쉬듯 편안해졌다. 마치 삽시간에 다른 세계로 빨려들어온 것만 같았다. 소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다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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