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적응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밤이 되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 역시도 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가 개운하지 않고 멍한 상태로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적응을 시작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몸이 생각대로 움직였다. 우선 집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은 상가 건물이 따로 없고 대부분 6~7층짜리 주상 복합 아파트다. 1층은 상가나 레스토랑, 사무실로 사용하고, 2층부터는 대부분 아파트로 쓰인다.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들이지만,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나라에서 창문이 앞집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집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창문은 커튼만 쳐도 될 것 같았지만, 대낮에도 블라인드까지 어둡게 내려져 있었다. 모두 직장에 다녀서 집이 비어 있는 줄 알았는데, 가끔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곤 했다. 화창한 날씨에도 가려진 창문 너머 어둠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도둑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낮인데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난민이 많아지고 경제가 악화되면서 2유로를 훔치기 위해 자동차 유리를 깨는 일도 빈번해져서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을 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이틀 전에도 대낮에 직장 동료의 집이 털렸다고 한다. 베갯속까지 헤집어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어이없게도 비싼 물건은 그대로 두고 구찌 아기 구두 하나만 없어졌다고 했다. 이곳 사람들도 명품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00년 된 건물이 오래된 것이지만, 로마에서는 그런 건물은 새 집에 속한다.
가끔 공사 중인 건물을 보면 신축은 거의 없고 내부 리모델링이 대부분이다. 옛 것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가장 크고, 혹시라도 새 건물을 지으려다 유물이 나오면 공사가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간편한 스마트 키 대신 무거운 열쇠를 몇 개씩 주렁주렁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낡고 불편하면 부수고 새로 짓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곳은 건물들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아서 길을 익히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누리끼리한 색깔의 비슷하게 생긴 건물과 현관문 때문에 길눈이 밝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간판이나 상호가 있으면 기억하기 쉬운데, 로마는 그렇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 방범, 교통정리, 민생을 담당하는 지방 경찰대가 있었는데, 현관문이 항상 닫혀있어 조용했고 작은 팻말만 붙어 있어서 매일 지나치면서도 한 달이 다 되어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특이한 것은, 일반 건물 벽에 조각이 있거나 가톨릭 성인이나 성모상이 세워져 있는 곳이 꽤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비슷하고 찾기 어려운 길은 조각상을 이정표 삼아 다녔다.
조각상 밑에는 누가 가져다 놓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싱싱한 꽃 한 송이씩 놓여 있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조화를 본 적이 없다. 거리를 걷다 보면 꽃집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사는 사람도 종종 보였기에 꽃값이 저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싸서 구경만 하고 나왔다. 지저분해서 뽑아 버리고 싶은 허브를 팔고 사는 것이 이상했다. 알고 보니 이는 관상용이 아닌 식용으로 요리에 직접 따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골길에도 꽃집이 있는 것이 의아했다. 들꽃이나 마당에 심은 꽃을 즐기는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의 여유와 작은 행복을 찾는 것 같다.
어쩐지 마음이 푸근하고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