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20대에 암 보험에 가입했을까
놀랍다.
저녁 8시 46분. 티브이를 켜니 홈쇼핑 채널 21번도, 22번도, 25번도 ‘똑같은’ 상품을 팔고 있다.
암.보.험.
암 환자들이 주로 이 시간에 티브이를 보는 걸까. 암에 걸릴만한 사람(?)들이 이 시간에 티브이를 보는 걸까.
쇼 호스트들이 세상 밝은 얼굴로 예비 암환자들을 향해 암보험 가입을 독려하고 있다. “니들이 언제까지 건강할 줄 알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즉시 가입해.”(물론 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그런데 상품 설명을 보다 의문이 든다.
회사는 왜 유방암을 ‘일반암’이 아니라 ‘특정암’으로 분류해서 진단비도 치료비도 적게 줄까.
말 그대로 유방암은 ‘암’이다. 경우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처음 유방암 카페에 가입했을 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환우들의 부고를 읽을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영화 ‘그리스’의 주인공인 청순하고 아름답던 배우 올리비아 뉴튼 존도 결국 유방암이 재발되어 지난 8월 세상을 떠났다.
재발과 전이를 염려해야 하는 다른 암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특정암’이나 ‘소액암’이란 이름으로 분류하는지.
“유방암 환자가 많으니까 보장액이 적어지는 거지.”
신랑이 무심히 답했다.
“자칫하면 저 세상 갈 수 있는 암인데?”
“그거랑 상관없지. 회사 입장에선 줄 수 있는 보장금액에 한계가 있잖아.”
2019년, 유방암은 갑상선암을 꺾고 여성암 1위에 올랐다. 한화 생명 발표에 의하면 작년 한 해 지급한 암 보험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암은 ‘유방암’이라고 한다. ‘보험금이 많이 나가서 보장액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신랑 말에 수긍이 갔다.
다행히 16년 전 가입한 내 암보험은 유방암을 차별하지 않았다. 다른 암과 똑같이 보장해줬다. 덕분에 진단비와 치료비를 온전히 받았다.
집안에 암 환자가 거의 없는데, 어떻게 20대에 암 보험에 가입했을까.
신규 교사 시절, 20대 공무원 신분인 나는 신용 카드 회사 영업대상 1순위였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뒷문으로 넥타이를 맨 영업맨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심지어 같은 회사에서 하루에 두 번씩 온 적도 있었다. (학교는-지금도 그렇지만- 외부인이 들어오기 너무 쉽다. 마음만 먹으면 교실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입장 가능)
그분들은 ‘특급 호텔 1박 무료’나 ‘주유 할인’ 같은 장점을 내세워 가입을 권유했다. 호캉스와는 먼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기름 냄새만 맡아도 간다는(?) 마티즈의 오너였기 때문에, 그런 혜택이 딱히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가족이나 지인들의 부탁으로 이미 지갑엔 카드가 넘쳐났다. 듣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하게 앉아 있으면 마지막에 똑같은 멘트가 날아왔다.
“그냥 가입해서 이 카드 딱! 한 번만 써 주세요. 그다음 잘라버리셔도 됩니다.”
다른 방식으로 읍소하는 분도 계셨다. 본인이 A카드 회사 신입 사원인데, 카드 실적을 올려야 정식으로 회사에 합격할 수 있다며 신입 사원 한 명 살려주시는 셈 치고 카드 한 장만 만들어 달라고 했다.(그런 미션을 주는 회사가 진짜로 있었는지 궁금) ‘내 취업이 너에게 달렸다’며 은근히 압박 전술을 펼쳤다. 문제는 이렇게 찾아온 이들을 다 취업시키려면 신용카드 백 장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 결국 나는 카드 회사 직원들이 나타나면 도서관이나 다른 반 교실로 도망쳤고 여러 번 숨바꼭질 끝에 그들과 힘겨운 이별을 했다.
이별의 아픔을 달랠 새도 없이 새로운 업종에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보험 회사에서 온 설계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암보험 상품'을 안내했다.
암 보험. 꽃다운 20대, 앞으로도 꽃길만 걸을 것 같던 그 시절에 ‘암 보험’은 마치 밍크코트처럼 평생 가질 일 없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물건 같았다. 예의상 설명서만 받아 놓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그분은 어떠한 ‘협박’이나 ‘읍소’ 없이 조용히 떠나셨다.
‘암보험 상품 설명서'는 잠시 내 책상에 머물다 재활용함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동료 교사들이 입을 모아 강조한 이 말 때문에 극적으로 구제됐다.
“그래도 암 보험 하나쯤은 있어야 돼.”
당시 동료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4-50대였는데, 하나같이 암 보험은 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한두 분만 그리 얘기했으면 흘려 들었겠지만 내 미래를 예감하셨나? 그분들은 입을 모아 계속 암 보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민 끝에 설계사님께 전화를 했다. 상담을 받고 납입액을 정하고 보험 설계서에 사인을 했다. 80세 만기, 20년 월납. 2006년 9월이었다.
16년 후, 그녀는 원금의 두 배 가까운 액수를 돌려받게 됩니다.
나의 선견지명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쨌든 보기 힘든 숫자가 똬악! 찍힌 통장이 우울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줬다. 암에 걸리고 직장을 쉬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다는 것도 위축되는데 경제력을 잃자 돈 쓸 때마다 신랑 눈치가 보였다. 특히 화장품이나 신발처럼 ‘나만의 물건’을 살 때는 더했다. 신랑이 절대 씀씀이로 뭐라 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스스로 쪼그라들었다.
그때 쪼그라진 내 마음을 펴 준 게 보험금이다.
거액은 아니지만, 보험금이 들어오자 소비에 자신감이 생겼다. 필라테스 개인 레슨을 등록하거나 동생이랑 브런치를 할 때, 망설임 없이 카드를 팍팍 긁었다. 소소한 충동구매도 가능했다. 레깅스랑 립스틱을 색깔 별로 사 들였다. 가슴 재건 수술을 하게 되면 C컵을 할까 D컵을 할까, 이왕 마취된 김에 데미 무어처럼 전신 성형으로 다시 태어날까 하며 즐거운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암 진단 이후, 저절로 유방암 예방 캠페인 홍보 대사가 됐다.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에 이상이 느껴질 때, 자가 진단하면서 고민하지 말아라. 무조건 병원부터 예약해라. 유방 초음파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꼭 받아라.” 하며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리고 16년 전 들었던 선배들의 조언을 덧붙인다.
“암 보험 하나는 있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