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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라 Dec 23. 2022

6월, 방사선 치료의 끝을 향해


탈의실에서 가운을 입고 출입문 옆 거울 앞에 선다. 실제보다 날씬해 보여 기분이 좋다. (떼 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거울이다.) 밖으로 나와 모니터에 환자 번호를 입력한다. 전광판에 이름과 순서가 뜬다. 내 차례가 되면 방사선 치료실에 들어간다. 가운을 벗고 침대에 눕는다. 팔을 올리고 몸은 얼음 자세.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 방사선을 쬔다. 5분 동안 눈을 감는다. (떠도 상관없다). 끝나면 옷을 갈아입은 후 거울을 한 번 더 본다. 방사선 치료 순서다.




잠깐 누웠다 오면 끝이라 쉬울 줄 알았는데 10일 정도 지나니 부작용이 나타났다. 낮에도 피곤이 몰려야 자주 졸았고 가슴에 울긋불긋 반점이 올라왔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하루 종일 놀다 벌게진 피부를 상상해보라) 간질거리던 피부는 붉어지다가 잘 익은 식빵 겉면처럼 어두운 갈색으로 변했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수분 크림을 발랐다. 다른 환우들은 연고나 크림을 처방받기도 하던데, 내 담당 선생님은 그럴 필요 없다며 수분 크림만 꾸준히 바르라고 했다. 약하게 화상을 입은 듯 피부가 따끔거렸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방사선 종양학과 선생님은 재미난 분이시다. 환자 질문에 ‘선별적’으로 대답하는 재주가 있다.



예를 들면,



“선생님, 수분 크림은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발라도 되나요?”




“네. 집에서 쓰시는 거 있죠? 알로에 젤이나 수분 크림. 그거 바르시면 됩니다.”



“샤워할 때 팔이 붓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기분 탓일까요?”



“……” (대답 없음. 타닥타닥 자판기 두드리며 모니터만 보심)



팔 둘레를 재서 부종이 없다는 걸 이미 확인했기에 설명하지 않는 것인가. 질문에 따라 대답을 할 때도 있고 묵비권을 행사하실 때도 있는데, 기준을 알 수 없다. 궁금하다. 연구대상이다. (방사선 치료 끝나기 전에 알 수 있으려나)




시간이 흐를수록 치료 부위는 색깔뿐 아니라 촉감도 빵 껍질처럼 변했다. 너무 많이 구워서 바삭바삭하고 건조한 빵. 짝짝이에 선명한 칼자국도 모자라 색깔까지 칙칙한 가슴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가슴은 6개월~1년 정도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니 걱정 뚝. 지금은 내 몸에 남아있을지 모를 암의 씨앗을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 환자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다. 편하게 힘 빼고 누워있기.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굳는다. 그럴 때는 살면서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부모님과 함께 유럽 자동차 여행을 하고, 브로드웨이에서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뷔페 투어를 다니고, 비엔나에서 오페라 마술피리를 보며 전율하고…



20회의 치료 동안 행복했던 추억을 모아보니 20개나 된다. 손흥민이나 김연아처럼 국위 선양은 못 했지만 꽤 재미난 인생을 살았다. 방사선 치료가 30회였다면 30개도 모을 수 있을 만큼. 감사한 삶이다.(물론 세상 불행이 내 뺨만 후려치나 싶은 일들도 많았지만요)






방사선 치료가 어느덧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집중 치료(국소 치료)만 남았다. 보통 방사선 치료는 암이 있던 쪽 ‘유방 전체’에 시행하는데, 특히 ‘암이 존재했던 주변’으로 범위를 좁혀서 치료하는 걸 ‘집중 치료’라고 한다. (종양이 있던 자리 및 그 주변부에서 재발 발생 빈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 내 경우 총 20회의 치료 중 마지막 4회가 집중 치료로 예정되어 있다.



집중 치료 첫날이다. 내 가슴은 오늘 활활 타오를 것이다. 암이 있던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격받게 될 테니. 침대에 눕자 차가운 냉 패드가 가슴을 덮었다.


“이제 얼마 안 남으셨네요.”


친절하고 예쁜 방사선사 선생님 말에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래 가슴아, 삼 일만 잘 버텨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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