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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sommar Mar 23. 2022

자율방역 시대를 살아가는 안내서

코로나19를 대하는 정말 마지막 글

1. 통제는 의미가 없다: 거리두기의 효력은 사실상 끝

아래 그림은 현재 사실상 모든 규제가 종료된 북유럽과 아직 거리두기가 남아 있는 한국을 비교한 것입니다.

국가별 상점과 여가시설 이용량. 출처: 아워월드인데이터


이용 가능한 가장 최신 데이터인 3월 12일의 이동량 데이터와 확진자 데이터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인구당 확진자가 가장 많지만 이동량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나라에서 확진자는 7일 격리된다는 점에서(* 스웨덴의 경우 의료진이나 필수업무 종사자는 5일 격리가 가능한 등 일부 차이가 있을 수 있음.)



확진된 사람들은 보건규칙에 의해 집에 머물러야 하므로, 이동량 비율에서 확진자 비율을 빼면 자발적으로 이동을 줄인 수치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ex. 이동량이 10% 줄었는데 인구의 3%가 격리된 경우, 자발적으로 이동을 줄인 인구는 7%)


아워월드인데이터 이용하여 직접 그래프 작성.

이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감염의 확산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이동량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의 거리두기 규정이 이미 모두 일몰되었음을 감안했을 때, 강제력이 있는 거리두기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이동량이 크게 줄어들지 않은 것은 인상적입니다.


북유럽의 코로나19 거리두기는 모두 끝났습니다.


하지만 덴마크를 제외하고 그들은 일상을 회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재택근무를 섞어서 하고 있고, 실내보다는 공원 등 야외에서 만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프면 언제든지 쉴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스웨덴의 다큐멘터리 <스웨덴 모델 뒤에서>를 소개했을 때, 카린 테그마르크 뷔셀 공중보건청장의 발언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다시 소개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의 위험 평가에 따라 필요한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가령, 요양원의 노인들은 가족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가족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위험하다고 할지라도.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감염되면?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을 돌볼 것입니다.
카린 테그마르크 뷔셀, 스웨덴 공중보건청장. 출처: sverigesradio

스웨덴이 방역지침의 준수를 자율에 맡긴 것은 집단면역의 추구도 아니었고,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 탓도 아닙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되,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선택은 개인에게 맡기는 자율방역의 추구였습니다.


저와 주변 사람들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식당이나 카페에 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 물론 아주 안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3번 만날 것 1번 만난 것 정도로는 한 것 같습니다.)


원하면 언제나 대중교통을 탈 수 있었지만 평소였으면 버스나 트램을 탔을 거리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대중교통의 이용을 줄였습니다.


집에서 걸어서 7분 쯤 거리에 있어서 매일 가던 마트는 1주일에 한 번 가는 등 쇼핑의 빈도를 줄였습니다.


약속을 최소화하고 집에 머물러달라는 것은 강제성은 없었지만 천천히 삶에 스며들었습니다.


스웨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이동량을 줄였고, 모든 규제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뉴 노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거리두기의 틀 안에서는 최대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식당이나 카페는 "최대 6명 11시까지"라는 틀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주어진 강제성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찾았고, 거리두기는 더 놀고싶은 우리를 헤어져야만 하도록 만드는 아쉬운 존재였습니다.


한국에서 거리두기의 효용은 이미 없습니다.


2. 지금은 위험하다: 지금은 의료체계가 압박받는 위험한 상황


하지만 위험한 상황임도 분명히 사실입니다.

한국의 의료체계 압박 상황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오미크론이 의료체계에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감은 연 5천명 내외의 사망자를 발생시킨다고 하는데, 주로 늦가을~봄인 10월~4월동안 사망자를 집중적으로 발생시킨다고 가정할 때 독감은 월에 8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발생시킵니다.
3월 17일 하루동안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는 429명이 보고되었습니다.

2021년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 871명이 사망했습니다. (출처: 통계청)
3월 17일, 코로나바이러스로만 429명의 사망이 보고되었습니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한 죽음(death due to covid19)과 코로나19를 가진 죽음(death with covid19)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가령 말기암환자가 코로나19에 확진된 상태로 사망했다면 사망원인을 코로나19라고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코로나19를 가진 죽음(death with covid19)로 분류합니다.)

덴마크와 우리나라의 감염의 확산이 비슷하던 시기 코로나19로 인한 죽음(death due to covid19)의 비율은 약 40%였습니다. (출처: 덴마크세럼연구소)
이를 우리나라 수치에 대입해보면, 하루에 약 260명이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초과사망률을 보아야겠지만, 영향이 없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 분명합니다.

한국과 스웨덴의 초과 사망률. 최근 초과사망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출처: 아워월드인데이터

3. 그래서, 자율방역 시대를 살아가는 안내서: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코로나19의 확산이 심하니 거리두기를 높이자는 주장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미 거리두기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거리두기를 완화하면서 위험성을 높일 수는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변수이며, 거리두기의 완화가 위험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위험성 판단에 따라 선택권을 주어야 합니다.
다시 카린 테그마르크 뷔셀 청장의 말을 옮겨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의 위험 평가에 따라 필요한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우리는 이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가령, 요양원의 노인들은 가족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가족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위험하다고 할지라도.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감염되면?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을 돌볼 것입니다.


방역당국이 지금 오미크론이 독감과 유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의 위험성을 실제 이하로 낮춰버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진자가 적을 때 "생활치료센터" 등을 만들며 위험성을 과대평가한다는 글을 여러 번 썼는데요,
지금은 반대로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위험한 질병입니다.
모임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방법, 가령 야외에서 모이는 것 등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만남을 계획했더라도 몸이 아프면 자연스럽게 취소할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계속 방역을 완화하자고 주장했고 여기에도 수많은 글을 썼지만, 지금 이것이 완화되고 있는 과정은 제가 원한 방향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외에 다른 것--가령 요양병원에서 외롭게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어르신들, 인생의 소중한 시기를 놓치고 있는 청소년들, 고통에 신음하는 자영업자들--을 생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코로나19의 위험을 감수하고 통제를 완화해나가는 것"을 실행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시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손을 잡고 성문 밖으로 나오자"라고 마음먹기를 원했습니다.


"치명률이 독감 이하"와 같이 "위험이 없으니 통제를 완화하자"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지쳤다, 어차피 다 걸린다, 독감이다" 등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혼자서 뛰쳐나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확진자 동선 공개, 생활치료센터 강제수용, 백신 패스 등등은 단기적으로는 감염 통제에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협력을 갉아먹는 지속적이지 못한 조치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산산조각나고, 서로가 서로를 외면할 때 우리는 다음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거리두기는 완화되고 있으니 터널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터널 밖에도 빛은 없어 보입니다. 겨우 터널을 빠져나왔는데 아직도 여전히 칠흑같은 어둠입니다.

(댓글로 달아주신 작가님께서 계셨는데, 정말 공감되는 말입니다.)


정점이 꺾이고 난 후에도 코로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아야 하는 것은 아프면 쉴 수 있어야 하고, 쉴 수 있도록 주변사람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율방역의 핵심이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방법입니다.

스웨덴은 한국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 수를 냈습니다.
백신이 없었던 당시 감염이 폭발하며 엄청난 사망자 수를 냈지만, 한국에는 백신과 치료제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남은 인구 모두가 코로나19에 감염되더라도 스웨덴만큼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사망자 수의 관점에서 스웨덴은 분명 커다란 실패이고, 한국은 빛나는 성공입니다.

하지만 스웨덴은 유례없는 공중보건 위기 상황 속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마음을 모아야 하는지,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지켜줘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무엇을 배웠는지,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위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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