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성향일까?
사람이 가진 성격의 다양성은 너무 심해서 도대체 그것을 체계화시키기란 몹시 힘들다. 물론 Big5 이론이나 혹은 일반적으로 많이들 하는 MBTI와 같은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보이는 분류 체계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해석들은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성향을 제대로 설명해 준다기보다는 보편적인 특징을 분류해 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의 어떤 성향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기준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흥미롭게 사람의 특징을 구분하는 한 가지 구분 방식이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라는 각자마다의 고유한 체계 속에서 우리들 자신을 타인과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있느냐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다.
그중 하나가 수직적 시점이고 다른 하나는 수평적 시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오직 한 가지 관점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극단적으로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사람이 있긴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대략적으로 수직적이거나 일부가 수평적인 면도 있는 편이다.
두 성향을 단순히 분포로만 보면 수직적으로 관계를 정의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편이고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니 보통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수직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고 온전히 수평적인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종류의 성향 분류 방식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수직적인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니다. 이 세상의 관계들이 대부분 수직적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수직적인 성향이 잘 나타나는 사람들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소수인 수평적인 성향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심한 경우 어찌할 줄을 몰라서 최대한 사람들을 피하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내가 어떤 성향인지 파악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생각보다 쉽다. 새로운 타인을 볼 때 무엇을 가장 궁금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수직적 관계를 맺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뭘까? 당연히 바로 자신의 '순위'이다. 그러니까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모두 줄을 세워 놓고 일등에서 꼴등까지 순위를 매긴다.
그렇다면 그때 순위의 기준점은 무엇이 될까?
아주 흔한 기준점으로는 재산, 학벌, 직업, 능력, 외모, 인맥, 경험, 사회적 지위, 가족, 재주, 평판 등이 주로 쓰인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 순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춰야 할 것들이다.
수직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이런 것들을 가장 궁금해한다. 그러니 수직적 성향이 아주 심한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어느 아파트에 사는지, 직업이 뭔지,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를 스스로 말하거나 상대에게 묻는다. 그나마 조금 덜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친밀해지면 묻기 시작한다. 이것을 딱히 묻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충분히 순위가 높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는 수평적인 사람들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듣다가 보면 은연중에 튀어나온다. 자신이 나온 대학,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자신이 아는 사람들 명단, 자기 가족들의 사회적 위치,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 등등 조금이라도 순위를 높일 것 같은 것들이 언급되고 반대로 알려졌다가는 순위가 낮아질 것 같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숨겨진다.
이런 정보들은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어떤 사건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불만 섞인 불평에서 자연스럽게 언급이 된다.
이때 상대적으로 높은 패를 가진 사람들은 주로 존경을 받게 되고 반대로 낮은 패를 가진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 누군가를 무척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딱히 누군가를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누군가를 무시하고 있는 마음이 반드시 존재한다. 존경과 무시는 우월감과 열등감처럼 서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하나의 쌍이다.
일반적으로 확실히 뛰어나거나 확실히 모자라지 않으며 누군가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때는 순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그야말로 상황에 따라서 엎치락뒤치락하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자신이 더 유리한 쪽으로 순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진 것의 가치를 위로 올리고 반대로 상대가 동일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밑으로 내리려고 한다. 물론 모두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늘 은연중에 생겨난다.
그런 목적으로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이 일어나며, 내 순위가 높다고 느낄 때는 잘남과 우월감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낮아졌다고 느껴질 때 못남과 열등감 그리고 질투심 등을 느끼며 기분이 상한다. 그리고 내 순위가 내가 가진 것에 비해서 너무 낮게 평가되는 느낌이 들 때 피해의식을 많이 느끼게 된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정한 순위가 있을 때 그것을 깨고 누군가 자신의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면 그것만큼 기분이 나쁜 것이 없다. 그래서 아주 갑자기 사회적 순위가 올라가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기존 인연들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경우도 흔하게 벌어진다.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낮게 봤던 사람이 갑자기 내 위로 올라서는 것을 쉽게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수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있는 존재들로 느껴질 수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그저 순위를 매겨서 자신의 관계망을 정의하려는 사람들이지 못되거나 어떤 인격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란 뜻은 아니다. 그러니까 잘난 사람들을 존경하거나 못난 사람들을 무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성향이 실제로 문제가 될 때는 잘난 사람들을 존경하는 수준을 넘어서 추종하거나 못난 사람들을 무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혐오하는 단계로 넘어갔을 때이다. 그때부터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보다 못난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못되게 굴지는 않는다. 지금 못났다고 해도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경험적 지식과 타고난 동정심이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부족한 상대에게 어느 정도는 잘해줄 수 있다. 단지 수직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잘해주는 조건에는 반드시 '내가 충분히 괜찮을 때'라는 아주 명확한 조건이 있다. 그러니 내 상태가 좋은 한 딱히 상대를 무시하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평상시 남을 무시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 좋지 않은 상태에 놓였음을 간접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오해가 하나 일어난다. 수평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보기 때문에 존경이나 무시가 없이 그저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서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도 수직형 사람들과 동일하게 뭔가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때 움직이게 되는 감정은 동정이 아니라 연민이다.
동정과 연민이 만난 교차점에서 만난 두 성향 사람들이 서로를 오해하게 된다. 상대를 자신처럼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스스로 오해를 했다고 인지하기가 힘들다. 그저 가끔 상대가 자신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원래부터 연민과 동정심의 경계는 모호하다. 하지만 따져 들어가 보면 둘 사이엔 수직과 수평이라는 아주 커다란 본질적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잘해주는 것이 동정이고 동일한 시선에서 잘해주는 것이 연민이다. 그래서 수직적 인간은 그 자신이 불운에 놓여서 순위가 내려가게 되면 더 이상 상대를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잘해주는 것을 멈춘다. 하지만 수평적 인간은 내 처지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느냐 여부와도 상관없이 불운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게 되고 가능하면 잘해주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보통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서 그렇다. 그 자신도 모르게 그런 도움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충분히 괜찮을 때'라는 조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든 회수될 수 있는 도움은 받을 때 불안함을 야기한다. 그러니 누군가을 도울 때 동정이 아닌 연민이란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꽤 오랫동안 꾸준히 잘해줘야 한다.
지금부터는 두 성향이 어떤 이유로 나뉘게 되는지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왜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일까?
사실 우리 인간은 보통 수평적으로 태어난다. 물론 타고난 성향이 수직적인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커 가면서 자연스럽게 수직적으로 바뀐다. 관계에서의 꼴등은 존재감이 없는 것이며,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손해를 입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상처가 되고, 그런 상처를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순위를 높이는 일에 점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엔 사람에 대한 경험이 적기 때문에 관심이나 인기와 같은 단순한 기준으로 자신의 순위를 가늠한다. 인기투표 자체가 바로 순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사회에 나오면서는 사회적으로 잘 통용되는 가치들로 기준이 바뀐다. 재산, 직업, 사회적 지위 등이 주로 그것의 후보들이 된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원래 타고난 자아에 한 가지 더 추가해 관계 속 순위를 전담하는 새로운 사회적 '나'가 만들어진다. 타고난 내가 아닌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나이다. 그것을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에고'라고 부른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에고를 발달시키고, 그것의 순위를 통해 자신의 안전함을 확인받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고는 끝없이 경쟁하고 이기려고 하는 성향을 드러낸다. 열등감과 우월감을 느끼게 하고, 잘남에 대한 기분 좋음과 못남에 대한 기분 나쁨도 경험하게 한다. 이때 느끼는 우월감이나 인정받음에 대한 기분 좋음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 에고가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에고가 강한 수직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순위가 낮은 것은 끔찍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주 열심히 삶을 살아간다. 높이 오르기 위해서 자신을 갈아 넣는 삶을 전혀 힘들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무시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그들의 노력부족이다.
하지만 에고가 약한 수평적 성향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경쟁 구도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밑에 깔려 있다가 그런 경쟁 중 탈락해서 밑으로 내려온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서로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에고가 약해서 아주 강한 추진력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개인적 성향 정도에서 끝나고는 사회 현상화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단 한 가지 성향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수직적으로 살다가 가끔 수평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의 순위에 그리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삶이 힘들게 된다. 그러다 보니 수평적 성향이 많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으로부터 위로를 받기도 한다.
자신의 고유한 성향이 수직적인지 수평적인지 아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타인과 어울리게 됨으로써 괜히 불필요한 감정 상함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두 성향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꽤나 극단적으로 달라서 잘못 어울리게 되면 그 원인도 모른 채 삶의 난이도만 높아지게 된다.
제대로 알게 되면 오랫동안 지속된 자기 착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남을 돕는 삶을 산다고 해서 수평적인 것이 아니며, 경쟁하면서 살아간다고 해서 수직적인 것도 아니다. 수직적이지만 남을 내려다보는 것이 기분이 좋아서 타인을 돕는 사람이 있고, 수평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을 밟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에게 잘해줬는데 은혜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한 배신감을 느껴 화가 났다면 처음부터 내려다보는 수직적 관계로 선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분명히 경쟁을 하고는 있지만 가끔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원래 수평적 성향이 강한 사람인데 살아남기 위해서 억지로 수직적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어떤 성향을 더 타고난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