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와 외부에 관한 비대칭성
아주 특별한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살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꽤나 자주 곤란함을 느낀다. 물론 곤란함의 종류나 심각한 정도는 사람들마다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다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꽤나 골치 아픈 경우가 꽤나 많다.
우리가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아마도 '누군가와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일 것이다. 갈등은 보통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선호도에 따라 각자 하고 싶은 것이 다르거나, 해야 할 일이지만 비슷하게 하기 싫어해서 서로에게 미루거나, 이득과 손해에 관한 계산식이 너무 달라 서로 반대되는 선택을 하거나, 정치나 종교에 관한 입장이 너무 달라 양립할 수 없을 때 생겨나곤 한다.
일반적으로 갈등의 가장 좋은 해결책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타협이나 적당한 조정이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거나, 너무 커다란 입장 차로 인해 도저히 그 차이를 줄일 수 없거나, 갈등 초입에 서로 주고받은 말로 인해 이미 감정이 상해버려서 더 이상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경우도 꽤나 많다. 뻔한 해법조차 적용되기 힘든 순간들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곤 한다. 하나는 이 갈등에 있어서 '내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사소한 의심이고, 다른 하나는 '너는 도대체 왜 저럴까?'에 대한 커다란 의문이다.
다들 그렇겠지만, 그런 두 가지 입장의 결론은 대부분 나보다는 상대에게 그 원인이 있는 쪽으로 흘러간다. 만약 나에게 그 원인이 있다면 내 삶에서 동일한 갈등이 끝없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진 갈등도 감당하기 힘든데 이후 내 삶에서 동일한 문제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음은 우리를 꽤나 두렵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는 가능하다면 원인이 내가 아니라 너이길 바란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객관성을 잃는다.
우리는 열심히 나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네 잘못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나름대로의 사실과 논리를 기반으로 내가 옳음을 증명하고, 상대가 틀렸음을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문제는 상대 역시도 나와 똑같은 입장이란 점이다. 상대 역시도 그만의 사실과 논리로 자신의 오해를 풀고 내 잘못을 증명하려 애쓴다.
갈등의 원인이 자신이 아니어야 하기에 사실과 사실이 충돌하고, 논리와 논리가 충돌한다. 서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서로 상대방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런 대화 속에서 갈등은 봉합되거나 타협되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의 골만 깊어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지? 이 정도로 알아듣게 설명을 했으면 제대로 이해하고 내 뜻이 맞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전개로 인해서 한번 발생된 갈등은 해결이 되긴커녕 점점 더 심각해져 버린다. 작은 갈등이 강한 분노로 바뀌고, 작은 실망이 복수를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전개를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어느 부분을 고쳐야 원래 목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 타협이나 양보를 통해 문제없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좀 더 확실한 사실을 제시해 상대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를 펼쳐 상대방이 어쩔 수 없이 내 말에 승복하게 해야 하는 것일까? 뭐,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쯤에서 매우 중요한 진실을 하나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갈등의 원인과 상관이 없이 우리가 갈등을 겪게 된 진짜 이유는 바로 '감정이 상해서' 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우리는 갈등의 상황마다 사실과 논리를 기반으로 해서 상대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려고 애쓰지만, 좀 더 차분히 상황을 바라보면 진짜 갈등의 이유는 처음부터 잘못된 사실이나 합당하지 않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오히려 감정만 상하지 않는다면 사실이 아니거나 전혀 논리적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누군가 갑자기 던진 길고 가느다란 밧줄을 보고 뱀인 줄 깜짝 놀란 상황에서 어떤 사실이나 논리가 있을 수 있을까? 사실 거기까지는 감정이 아니라고 쳐도 이후 밧줄을 던진 사람이 나의 겁먹은 표정을 보고 비웃음을 보였다면 그때부터는 감정이 폭발한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정작 따지는 것은 왜 비웃냐가 아니라 왜 갑자기 밧줄을 던졌는지에 대한 것이다. 상대는 그럼 밧줄을 던질 때마다 말해야 하냐고 따진다.
그런데 우리는 왜 비웃음에 대해서 따지지 않고 밧줄을 던진 것에 대해 따질까? 거기엔 우리의 오래된 경험적 기억의 보호 작용이 작동한다. 만약 비웃음으로 인해 기분이 나빴다고 따지면 상대는 금세 '내가 언제 비웃었어? 그냥 네 모습이 웃겨서 그랬어',라고 하면서 금세 빠져나간다. 사실 상대가 나를 비웃었다는 것에는 어떤 증거도 없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뭐라고 더 따지겠는가? 그러니 밧줄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다. 내 기분은 이미 상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무의미한 따짐이 시작된다.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식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감정을 의도대로 만드는 사람을 우리는 가식적인 사람이라거나 혹은 연기자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가 감정이라는 비논리적 상황을 논리의 문제로 대응하는, 꽤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오래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일단 갈등이 벌어지게 되면 가능하다면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내게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행위는 나름대로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그것에 깊게 빠져 버렸다.
만약 운 좋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내 편을 들어줘서 어찌 되었건 간에 내 감정이 어느 정도 주변의 납득을 받고 갈등의 대상도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했다면 어느 정도 선에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때 우리는 보통 발생한 감정을 내면에 둔 채 망각의 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해결이 아닌 잊힘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만들어졌든 해결이 되지 못한 감정은 거의 영구해 내면에 새겨지게 된다. 그래서 80세 할머니가 10살 때 오빠한테 당한 차별의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표피층이다. 언제라도 갈등의 상대를 만나거나 자신과 비슷한 억울함을 당하는 드라마를 보는 날이면 그날 느꼈던 기분 나쁜 감정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만약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누적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몹시 우울해지고 만다.
왜 우울해질까? 그 이유는 바로 대부분의 갈등의 상황에서 어찌 되었건 간에 내 잘못도 일정 부분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 모든 것이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내 잘못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 누구도 편을 들어주지 않아도 내 잘못이 전혀 없어 보이는 갈등은 사실 별 다른 문제가 안된다. 그것은 그 누가 뭐라 해도 명백한 상대방의 잘못이기에 화만 날뿐 억울하거나 우울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연 수많은 갈등 상황에서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때 우리는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 한 가지 영리한 방법을 쓴다. 나의 잘못은 최소화로 줄이거나 혹은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납득하거나, 남의 잘못은 최대한 부풀려주는 제 삼자의 시선을 찾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인간에 관한 매우 상반된 두 개의 관점을 말하고 있는 인문학 책이나 심리학 유튜브 영상을 본다.
그중 하나는 나를 향한 따뜻한 위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이다. 그러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고 고달픈 나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나를 그렇게 만든 이 세상 사람들의 불쾌한 속성에 대한 비판을 하는 말과 글에 끌린다.
한 손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다른 한 손에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 들린다. 떡볶이는 나에겐 따뜻한 선물이 되고, 쇼펜하우어의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날 서고 냉소적 지적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이 된다.
나는 온전히 순수한 감정으로만 경험되고, 타인은 완벽한 이성으로만 정의된다.
그럼에도 딱히 문제는 없다. 단지 나를 위로하면 할수록, 타인을 비판하면 할수록 우리가 얻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고립이다. 내가 문제가 없고 세상 사람들이 문제 투성이인데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겠는가? 그 고립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더 강화될 뿐이다.
물론 고립도 하나의 해결책이긴 하다. 하지만 행복하기는 힘들다. 단지 불행해지는 것을 좀 막아 준다.
이런 고립을 피할 뭔가 다른 방법은 없을까? 물론 당연히 있다. 단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그냥 혼자 살고 만다. 그럼에도 알아보기는 하자. 실천은 힘들더라도 어떤 방법이 있는지는 알아야 언젠가 바뀔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위로를 멈추는 것이다. 너무 힘들 땐 어느 정도까지는 해도 되지만 절대로 과하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바로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에 나 자신도 끼워 넣는 것이다. 나도 거기에 나오는 비난받을만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쇼펜하우어에게 나는 외부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과 나와 사실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그토록 싸워왔던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는 싸울 필요가 전혀 없다. 비슷하니까 싸우는 것이다.
타인을 향하는 모든 비난에 나 자신도 대상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면 삶을 보는 관점 자체를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다. 내 감정을 따뜻하게 받아주듯 타인의 감정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들도 나처럼 힘든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분노하고 있다. 그들도 나처럼 남들과 잘 지내고 싶은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관심받고 싶은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이기적인 것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내 주변엔 좋은 사람들만 남을 것이다. 원래 좋은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잘 지내고 싶어 한다. 그래야 그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