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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이라는 무게

자기 증명이라는 덫

by 전찬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참 다양한 힘듦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그것이 있는지조차 잘 인식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평생 동안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 문제는 어느 날 마음 잡고 딱히 생각해 보지 않는 한 절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작동한다. 평생 중력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평소에 중력으로 인해 우리가 느끼는 무게가 발생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를 평생 누르고 있는 마음의 문제는 바로 '나는 밥값을 하고 있는가?'이다.


우리가 밥값에 대해 평생 동안 눌리게 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처음 태어난 순간에 거의 '밥 버리지' 수준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생아 시절을 유추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온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 우리는 매일 먹고 싸고 자기만 했다. 밥값은커녕 밥만 축내는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랬던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나아지긴 했다. 몸이 자라고, 주변 인식 능력이 늘고,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이라도 자기 역할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우리들 대부분은 생산성이라고는 거의 없는 존재로 거의 20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떤 경우엔 거기에서 벗어나기엔 30년도 더 걸린다.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40년, 50년도 되는 경우도 있다.


그 사이 우리는 의식적으로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밥값을 해야 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어린 시절엔 나를 전적으로 먹이고 있는 부모님에게 많이 느낀다.


비싼 학원을 다녔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을 때, 좋은 대학교를 들어가지 못했을 때, 제때 괜찮은 회사에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렇다. 그 당시에 밥값이라는 것이 실제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모님의 투자에 대한 적절한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인데,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피해의식도 생긴다. 차라리 부모님이 나에게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면 부모님만 원망만 하면 끝인데, 제대로 잘해줬는데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그렇게 된다.


그런 압박을 주는 것은 부모님만이 아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원에서 강사가, 친구가, 친척이, TV에 나온 얼굴만 아는 교수가, 영화 속 주인공이, 유튜브 영상 속에서, 수많은 시간과 장소와 경로를 통해 나에게 밥값을 해야 한다는 간접적인 압박을 가해 온다.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부터 겪게 된 다양한 압박의 경험으로 인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밥값을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부담감을 갖게 되고, 평생에 걸쳐 그것을 처리해 내려는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만약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괜히 불안해지고 심할 경우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봐도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실 누구도 밥값을 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더해서 밥값을 제대로 했는지 여부는 그 누구도 판단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명확한 요구자도 없고 정해진 평가자도 없는데 나 혼자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인 셈이다.


우리가 밥값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는 평생 동안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바로 '나의 필요성'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회사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되면 쫓겨나게 된다. 친구 무리 사이에서도 무용한 사람이 되면 연락이 뜸해진다. 취미 생활 모임에서도 전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면 잊힌다. 그게 어디든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필요한 이유가 딱히 없다면 무리 속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류라는 거대한 무리 속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것을 밥값을 함으로써 증명된다.


결국 우린 평생 동안 인류라는 무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평생 밥값을 해야만 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그건 동굴에서 살던 시절, 마을에서 쫓겨나면 죽을 수밖에 없던 시절의 기억이다.


수만 년 전, 수백 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 시대엔 전혀 필요 없다. 요즘은 일부로 혼자 사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린 이제 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가족 정도의 무리 속에만 속해도 얼마든지 안전하게 살아간다. 나머지는 국가에서 책임진다. 우린 세금만 잘 내면 된다.


밥값을 다른 표현은 바로 '자기 증명'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것, 그래서 나는 버려지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할 삶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가 노인이 되어서 무기력해졌을 때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무용한 것, 쓸모없는 것, 밥만 축내는 존재,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존재 등등, 젊은 시절에 충분히 밥값을 하고 있을 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정신적 압박감들이 들어온다.



그나마 아예 노인이 되면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서 괜찮다. 하지만 퇴직 직후나 아이들을 이제 다 키워서 독립시킨 후엔 경제나 육아와 같은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이 사라지면서 갑자기 '불필요한 존재'가 되면서 급 우울증이 몰려온다. 물론 그 누구도 그런 일을 수십 년에 걸쳐서 해낸 사람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는 다르다.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밥값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뭐라도 찾아야 한다. 내가 밥만 축내는 인간이 아님을, 내가 세상에 살아갈 만큼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해야 한다. 그런데 늘 그것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끔 잘 안될 때 우울해지기도 하고,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친구나 지인을 봤을 때 부럽고 질투가 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심하게 한심하게 느껴지게도 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반드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주제가 있다. 도대체 우리는 왜 밥값을 해야 하는 것일까? 또한 어디까지 해야 제대로 된 밥값을 한 것일까?


정확히 말하면, 매일 하루를 살아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정말로 잘 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스스로 끝없이 밥값에 대한 압박을,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린 시절 밥버러지였던 시절의 기억을 왜 평생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먹고사는 데 있어서 남의 손이 필요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왜 스스로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것일까?


퇴직 후 그냥 집에서 뒹굴거리면 될 것을 대한민국 명산 100개를 다 올라야 하고, 자전거로 전국을 돌아야 하고, 취미생활을 최소한 3개는 해야 하고, 매일 운동을 해야 하고, 악기는 2개는 다뤄야 하고, 해외여행은 1년에 한 번 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누가 그것들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킨 것일까?


이미 먹고살 것을 어느 정도 마련해 뒀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쉬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건강을 위해서 약간의 운동이 필요하고, 가끔 사람도 만나 차를 한잔 해야 할 것이다. 심심하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하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평생 안고 살아온 밥값에 대한 압박감을 도저히 떨칠 수 없다면, 밥값을 했다는 기준점이라도 스스로 세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 조차도 남이 제시한 것을 기준으로 만들어 놔서 달성하기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고 말았다. 그러니 조금만 틀어져도 우울해지고 만다.


모르고 살았을 때는 그렇다고 쳐도 이제 알게 되었다면 불필요하게 밥값에 그렇게 쫓길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해야 할 타당성을 증명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어느 날 문득 태어났고 내가 할 유일한 일은 최대한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 하루라도 더 오래 살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잘 살았다고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떠나면 된다. 그 전체 과정은 남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 삶이 유일하게 남과 관련이 있다면, 남들과 함께 어울려야 더 행복할 수 있고, 남들과 많이 지내야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고, 더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남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그런데 남의 역할을 너무 키워서 오히려 내 삶을 좀 먹게 만든다. 결국 남이 내 삶에서 손해가 되고 만다.


세상에 내 필요성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내가 밥값을 제대로 하는지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것들을 위해 남의 눈치를 보거나 타인의 평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 그저 나는 나로서 존재하다가 가면 끝이다.


삶은 온전히 내 것이고, 그것은 유일하게 나만이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남의 삶에 관심이 없다. 남의 삶에 내 삶이 영향을 받을 것 같을 때만 관심이 있다. 그러니 아프리카에 사는 이름 모를 누군가보다 내 집에 키우는 개가 더 소중하다. 나에겐 인간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소중하다. 내가 인간이 소중하다고 믿는 유일한 이유는, 그래야 남들도 나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키우던 개가 죽었을 때 다른 개를 가져다가 키우지 않는 이유는, 죽은 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개를 잊지 못하는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죽은 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죽은 개를 잊지 못하는 의리 있는 사람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건 의리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개뿐만이 아니라 모든 남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오로지 내 감정 하나뿐이다.


그런 삶인데도 왜 자꾸 왜 남의 시선과 판단과 기준점을 가져다가 스스로를 괴롭히는데 쓸까? 이제 좀 멈춰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쩌면 죽을 날이 찾아왔을 때 비록 반갑지는 않더라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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