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빛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빛은 특별한 단계에 올라선 몇몇 사람들에게만 보일 뿐, 보통 사람인 우리들의 눈에는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빛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서 상대가 평소에 하는 말, 행동, 생각, 상식, 현재 처한 상황, 주어진 여건 등, 다양한 정보들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간접적 정보일 뿐이다.
다행히 스스로 내고 있는 고유한 빛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과정엔 그런 정보들이 필요 없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딱히 그런 간접적 정보를 참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에 대한 정보는 그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많이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자신만의 고유한 빛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타인의 빛도 못 보지만 자신이 내고 있는 빛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의 가장 본질적인 시작점은 우리 각자가 내고 있는 빛의 출처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빛 이외에도 한 가지 더 추가적인 빛을 내고 있다. 하지만 이 빛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빛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 빛은 그저 타인으로부터 받은 빛을 단순하게 반사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만들어 낸 빛과 외부에서 온 빛을 반사한 빛, 이 두 가지를 혼란스럽게 뒤섞어서 외부로 내보내고 있다. 그러니 설령 누군가가 내고 있는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이 과연 그 사람 본연의 빛인지 아니면 그저 반사한 빛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밤하늘에 창백하게 아름다운 노란빛으로 떠 있는 달은 사실 어떤 빛도 내고 있지 않은 천체이다. 달은 그저 태양의 빛을 반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반사각도의 차이로 의해 달의 모양은 한 달을 주기로 변해간다.
스스로 내고 있는 빛과 그 빛이 반사되어 보이는 빛은 외부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구분이 되질 않는다. 그러니 외부에서 보면 전혀 어떤 빛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달조차 마치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않는가?
그 빛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단지 그것은 빛을 발산하고 있는 주체만이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어떤 고유한 빛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시선이 외부가 아닌 내면으로 향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혀 반대의 행동을 한다. 자신이 어떤 빛인지를 알기 위해서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빛을 반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고 있는 빛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끝없이 이뤄지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참고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가능하다면 순간적이라도 '긍정적 평가'를 얻으려 노력한다. 그것은 마치 수 천장의 사진을 찍은 후 가장 잘 나온 한 장의 사진으로 자신의 외모를 정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태양이 자신의 고유한 빛을 알기 위해서 금성과 지구와 화성에게 묻는 꼴이다. 금성은 노랗게, 지구는 푸르게, 화성은 붉게 그 색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태양은 과연 자신의 고유한 빛을 어떤 색으로 정의해야 할까?
사실 반사된 빛은 스스로 만들어 낸 빛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어떤 종류의 빛을 발산해도 상대가 다 흡수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언제나 검은색이 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반사된 빛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의해 결정되고 만다. 그러니 그 빛은 처음부터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빛을 알기 위해서 타인으로부터 반사된 빛만 바라보려고 한다. 그것은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말이다.
그 반대 현상도 일어난다. 상대방이 발산하고 있는 빛을 바라볼 때 그 빛이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것과 타인으로부터 받은 빛을 반사한 것을 뒤섞어 놓은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빛을 그 사람의 고유한 빛이라고 여긴다. 그 혼란스러운 빛의 뒤섞임을 뚫고 그 안에서 상대방의 고유한 빛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외부적으로 보이는 상대방이 보여주는 빛에만 현혹되고 만다.
나의 빛은 상대방으로부터 반사된 것으로 결정하고, 타인의 빛은 그 사람이 어지럽게 뒤섞어 내놓은 빛으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지금 현재 반사하고 있는 그 빛은 도대체 얼마나 많이 왜곡된 것일까? 그 빛에는 나에 대한 반사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빛과 또 다른 많은 다른 사람들의 빛을 반사한 결과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오염된 채 반사되고 있는 그 빛을 우리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정의한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오염되어 정의한다. 그리고 난 후 그 결과를 가지고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우쭐하거나 자학한다.
이 오래되고 잘못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다. 웃기는 말 같지만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벽히 무관심하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오늘도 나를 평가하고 있는 '누군가의 평가' 뿐이다.
나에 대한 무관심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타인의 나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네가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하게 아니라 '너의 나에 대한 평가'가 궁금할 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상대가 나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수준이 괜찮아야 한다. 수준이 낮은 상대의 평가는 그 내용에 상관없이 어이가 없거나 불쾌할 뿐이다. 반대로 나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평가 역시 그 내용에 상관없이 그 어떤 비판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런 식의 나에 관한 무관심은 타인에 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고유한 빛을 내고 있는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고유한 빛을 내고 있는지를 알려고 할 기회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그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문제의 시작이 '나 자신에 대한 무관심'이니, 문제의 해결책은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다. 외부로 향하던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것이 해결의 시작점이란 뜻이다.
그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자신이 내고 있는 고유한 빛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필요해 보인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른 채 그저 사용만 하고 사는 것은 소중하게 주어진 삶에 대해 참 미안한 일이다.
우리는 '나'의 소중함에 함몰되어 '삶'의 소중함을 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