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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 Jul 11. 2021

7. 새로운 접근법(3)

그에 따른 여러 고찰들.

이제 다양한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1. 기존 체계(보편성)를 부정하는 것.

 선의 체계에 "갇혔다"는 느낌은 매우 불편한 감정이라 마치 기존의 선의 체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기존의 체계를 부정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무한의 과정이다. '선의 체계에 갇혔기 때문에 모든 기존의 질서를 부정한다'는 말 안에 '갇혔다.'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기존 질서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이미 해당 문장이 기존 질서를 따르는 셈이다. 이건 회의주의에 불과하며, 회의주의는 자기 유사성이다. (탈피 불가능이다.)


 

 2.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 

 생각의 이론적 총량과 선의 체계 분리라는 관점과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사상(절대, 상대, 허무주의)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절대주의는 이 수많은 선의 체계를 하나의 인간상으로 끼워 넣는 행위다. 물론 잘 들어맞는 명제들도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선의 변화가 매우 더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되는 것을 막는 장벽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의심 자체를 억제하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밀리고 밀리다, 곪아 터져 버린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이다. 그 이후 유럽은 새로운 국가체계를 받아들인다.

 상대주의는 각 선의 체계를 모두 존중하는 것이다. 상호 배타적 상황을 모두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명제를 참으로 보는 입장과 거짓으로 보는 입장을 모두 포함시켜야 한다. 심지어 자신을 부정하는 명제까지도 포함해야 하는 상황.)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자기 유사성, 무한의 개념을 따를 수밖에 없다.

 허무주의와는 거의 같은 개념이다. 각자의 선의 체계에 갇혔다는 것은 곧 각자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의미기도 하다. 


 3. 객관적, 절대적 선은 부정당한 것이다?

 그럼 여태껏 쌓아 올린 기존의 체계들, 존귀하다고 믿는 어떤 것들은 전부 부정해도 된다는 것인가? 개인 마음대로, 좋아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는 말인가? 허무주의의 관점에서는 해당 명제를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도덕이라는 개념은 유전적 경쟁과 문화적 경쟁이 뒤엉킨 지점에 존재하는 개념이니까. 좋아하는 대로, 자신을 파탄시키며 염세적으로 살아도 크게 상관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심해라.

 

 "당신은 자연선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런 염세적인 당신을 누가 좋아할까? 그런 비관적인 당신을 누가 따를까? 그런 부정적인 당신과 누가 결혼을 할까? 결국 당신의 유전자와 밈은 소멸하고 거대한 보편성의 굴레에 살아남는 것은 보편성과 독창성을 적절히 겸비한 매력적인 누군가일 것이다.

 또한, 사실은 기존 체계를 부정하는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기존 체계에 대한 부정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인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온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당함이라 본다. 선의 체계를 고찰하다 보면 서로 충돌하는 선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기준을 스스로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선의 체계가 극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모아 놓고 고찰하는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 내린 기준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보편성이 옳다고 보는 입장이다. 내가 가지는 선의 체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선인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고찰하며 비판하고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가? 당신도 이것이 옳다고 보고 있는가?)


4. 상실감에 대한 올바른 이해.

 허무주의자들에게 인간성을 상실한 집단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멸시키는 끔찍한 주장이다." 도덕의 소멸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언급한 절대적 이타성의 소멸처럼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조금 다르게 본다. 


 "과연 진리가 없다는 결론으로 인해 허무한 것일까?"


 당신은 자신의 허무감에 대해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정말 객관적인 도덕, 선이 있다고 보자. 그리고 신도 있다고 보자.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났다. 그럼 객관성에 벗어난 누군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아니 애초에 그런 결론이 난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객관적인 선에 무조건 따르게 된다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끼지는 않는가?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선호, 자유의 갈망에 대한 해소는? 그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정말 없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가? 허무감은 진리의 무존재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인류가 수천 년간 찾아온 무언가에 대한 결론, 그 뒤편에서 오는 감정의 반동인 것이다. 허무감은 탐구, 고찰의 "과정"안에서만 소멸되는 존재다. 무언가 결론이 나온다면, 허탈함과 상실감은 반드시 뒤따른다. 진리의 무존재가 허무감을 만드는 게 아니다.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단지 그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일 뿐이다."


  절대주의가 옳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그것대로 결론이 난 후에는 상실감이 뒤따른다. 실존주의는 그렇기에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명심하라.


 "절대적, 객관적 선과 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선이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뿐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선이 보편적인 선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타인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존중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면, 타인이라는 존재가 얼마 소중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가치를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보편성에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5. 개별성에 대한 고찰.

  상대주의라는 개념이 생겨나며, 타인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개별성 존중"이라는 것이 하나의 보편성이 된 셈이다. 물론 특정 개별성에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생각에는 "개별성 존중"이라는 선이 작동해 기존보다는 열린 자세로 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절대주의와의 거대한 차이점이다. 의심을 배척하는 문화가 적어진 셈이다.

 그러나 결함이 있다. "개별성 존중"이라는 것이 신격화되어 자신의 개별성을 정당화하며 강요하기까지 한다. 타인이 자신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 또한 개별성에 속하다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이는 상대주의이라는 이름의 절대주의와 같은 현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실존주의와 같은 선의 체계의 개별화다. 자신의 주장 역시, 거대한 이론적 총량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개별성을 강요하는 순간부터 개별성의 의미는 상실된다. 자신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인지하고 자신의 개별성을 존중하자. 정말 기존의 질서에 맞서야만 하는, 보편성으로 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는 개별성인지, 아니면 "개별성 존중"이라는 하나의 보편성 뒤에 숨은 추악한 개별성인지를 우리는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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