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이 Jul 11. 2021

6. 새로운 접근법(2)

 4.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각 개인은 자신의 선의 체계에 갇힌 것이다.) 

 도덕, 윤리, 선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것에 반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는 이러한 의심 자체를 악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선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한다. 살인이나, 범죄, 사랑과 모성과 같은 선, 악을 느끼면서도 말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선의 체계에 갇힌 인간이라고 본다. 대부분은 앞서 말했듯 보편적인 선의 체계를 가진다. 실제 그렇게 개별적인 선의 체계를 지닌 인류는 대부분 소멸되었다. 물론 남아있기는 할 것이다. 또 새로 태어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 또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다.


 "도덕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에 있는 존재들이다."


 절대주의가 주장하는 "다가가는 것". 그러나 이 "다가가는 것"을 만드는 사람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사람이다. 자신의 개별성을 보편성으로 바꾸면서 일어난 개혁의 과정을 절대적 전리에 다가가는 것이라 본다면 논리적으로는 할 말은 없다. 마치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질문이다.

 인류가 어떤 보편성의 끝에 도달했다면, 그것을 절대 주의자들은 객관적 선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끝에 도달이 가능한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일단 가능하다고 보자.) 그럼 다가가고 있는 지금은? 끝에 다다르지 않은 지금은 어떤가? 만약 절대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붕괴해 어떤 끝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19세기와 20세기에 드러났지 않은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의 고찰만으로 선의 체계를 바꾸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의심이라는 관념은 어떤 대상을 인지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지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의심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했던 "의심의 딜레마"다. 


 이처럼 자신의 선의 체계에서 한 번도 빠져나오지 않았던 사람은 자신의 선의 체계에 대한 의식 자체가 힘들다. 의심은 더더욱 힘들다. 그냥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선이었던 수많은 악이 현대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의심이라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했으니까. 갇혔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믿음에서 벗어나 본 사람들만이 체감할 수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절대주의의 관점을 고수한다면 일어나기 어렵다. 애초에 각 시대의 절대주의가 자신의 시대에 보편적 선의 체계를 객관적, 절대적이라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완정성의 원리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선의 체계가 한 개인의 공리라고 한다면, 한 개인 선의 체계 안에서 자신의 선의 체계를 인지하는 것은 공리를 증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순환논리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선의 체계를 가진 타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혹은 다른 상황, 문화라거나. 절대주의는 거의 모든 환경이 통일된 선의 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화 전체가 이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를 띤다. 현대에는 개별성이 많아지면서 빠르게 선의 체계가 바뀌어 가고 있지만, 절대 주의자들은 이들이 바꾼 선의 체계를 다시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끼워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론이라는 것은 예외가 거의 없도록 설명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끼워 넣는 듯한 절대주의는 이론적인 아름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의 이론적 총량과 개인이 이를 판별하는 선의 체계, 그때의 분포와 개별성, 보편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딱히 예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옳다고 본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이것은 허무주의와 실존주의로 연결된다.)


5. 유전자와 비교.

 유전자는 한 개체 내에서 진화하지는 않는다. 유전자는 개체군 단위로 진화한다. 즉, 태어날 때 정해진다. 가령, 한 기린의 목이 다른 기린의 목 보다 약간 더 길다. 목이 긴 기린이 생존에 유리하며 다음 세대에 기린은 목이 긴 기린의 자손이 점점 많아진다. 유전자 풀(고유 대립형질의 총량)이 많아지는 셈이다.

 그러나 "생각"은 다르다. "생각"은 모든 풀(생각의 이론적 총량)이 뇌 안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의 선의 체계는 각 개인이 지닌 진리(공리)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개인 차원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는 뇌로 인해.) 그래서 의심이 가능은 하지만, 이미 설계된 선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각각의 공리들이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기 교육이나, 세뇌 등으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실에 존재했던 지옥이라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각자의 선의 체계가 뚜렷이 관찰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더욱 삶의 의미를 관철하는 반면, 어떤 인간은 더욱 악랄하게 타락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 인간의 선의 체계는 변화하기도 하지만, 어떤 불변의 영역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굳게 믿고 있는 선이 미래에도 합당하게 선이라고 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미래의 선의 체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생각의 풀, 그 안에서 자연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가련한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7. 새로운 접근법(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